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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는 조선 연산군 4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던 중 김일손이 사초에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은 것이 문제가 되어, 유자광·이극돈 등 훈구 세력이 김종직 문하의 사림을 죽이거나 귀양 보낸 사건이다.

김종직을 모신 밀양 예림서원의 육덕사

성종은 훈구 대신을 견제하려고 길재의 학통을 이은 영남 사림의 스승 김종직과 그 제자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을 등용했다. 이들은 삼사를 중심으로 세조의 공신들을 비판했고, 훈구 세력과의 갈등이 깊어졌다. 네 차례 사화 가운데 첫 번째이며, 사초가 발단이 되어 '史' 자를 써서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한다.[1]

  • 「조의제문」 - 김종직이 1457년(세조 3) 10월 꿈에 초나라 회왕(의제)을 만났다며 지은 제문이다. 항우에게 죽은 의제를 애도하는 형식이었으나,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죽은 단종을 빗댄 글로 해석되었다.[2]
  • 사초 - 김종직의 제자로 춘추관 사관이던 김일손은 이 글을 자신의 사초에 실었고, 이극돈이 세조 비 정희 왕후의 상중에 전라 감사로서 기생과 어울렸다는 일도 적었다.
  • 원한 - 김종직은 남이를 무고해 죽인(→ 남이의 옥) 유자광을 멸시해, 함양 군수 시절 유자광의 시 현판을 떼어 불태운 일이 있었다.

1498년 『성종실록』 편찬을 위해 실록청이 열리고 이극돈이 당상관이 되었다. 이극돈은 김일손의 사초에서 「조의제문」을 찾아내 유자광에게 알렸고, 유자광은 노사신·윤필상 등과 함께 김종직이 세조를 비방한 대역부도의 죄를 지었다고 연산군에게 아뢰었다. 7월 17일 연산군은 "김종직이 제자들과 함께 세조의 덕을 헐뜯고 김일손이 역사에 거짓을 쓰게 했다"며 형벌을 논의하게 했다.[2]

  • 이미 죽은 김종직은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베는 부관참시를 당했다.
  • 김일손·권오복·권경유·이목·허반 등은 사형되었다.
  • 정여창·김굉필 등은 곤장을 맞고 먼 곳으로 귀양 갔다.
  • 사림은 크게 꺾였고, 연산군은 이를 계기로 대간의 간언을 더욱 꺼리게 되었다. 1504년에는 폐비 윤씨 사건을 빌미로 갑자사화가 이어졌다.

조선의 사화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화 왕·연도 계기
무오사화 연산군 4년(1498) 김일손이 사초에 실은 김종직의 「조의제문」
갑자사화 연산군 10년(1504) 성종 때 폐비 윤씨의 죽음
기묘사화 중종 14년(1519) 조광조의 위훈 삭제 주장 (→ 기묘사화)
을사사화 명종 즉위년(1545) 외척 대윤(윤임)과 소윤(윤원형)의 다툼
  1. ↑ 무오사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2.0 2.1 『연산군일기』 권30, 4년 7월 17일 신해, 무오사화, 사료로 본 한국사,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