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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사화(己卯士禍)는 1519년(중종 14) 남곤·심정·홍경주 등 훈구 세력이 위훈 삭제를 주장하던 조광조 등 사림을 몰아내 죽이거나 귀양 보낸 사건이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난 뒤 중종은 반정 공신의 힘을 견제하려고 사림을 등용했다. 1515년 관직에 나온 조광조는 중종의 신임을 받아 성리학적 이상 정치(도학 정치)를 펴려 했고, 김정·김식 등 젊은 사림이 그를 따랐다. 그러나 급진적인 개혁과 공신에 대한 공격이 훈구 세력의 거센 반발을 불렀고, 중종도 점차 조광조를 꺼리게 되면서 사화가 일어났다.[1]

조광조의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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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량과 - 학식과 덕행을 갖춘 인재를 천거받아 간단한 시험으로 뽑는 제도로, 1519년 실시해 사림을 많이 등용했다.
  • 소격서 폐지 - 도교 제사를 맡던 소격서를 미신이라 하여 없앴다.
  • 향약 보급 - 여씨향약을 한글로 풀이해 펴내고 향촌에서 시행하게 했다. 『이륜행실』도 간행했다.
  • 위훈 삭제 - 중종반정 공신 가운데 공이 없이 이름을 올린 사람이 많다며 공신 76명의 공훈을 깎을 것을 주장해 관철했다. 이것이 사화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 홍경주·남곤·심정 등은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만들어 조정을 어지럽힌다고 모함했다. 대궐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조씨가 왕이 된다)'이라는 글을 써 벌레가 갉아 먹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1519년 11월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 갔다가 사약을 받았고, 김정·김식 등도 죽거나 귀양 갔다. 현량과는 없어지고 위훈 삭제도 취소되었다.
  • 이 일로 화를 입은 선비들을 기묘명현이라 한다. 조광조는 선조 때 복권되었고, 뒤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사림은 이후 서원과 향약을 근거로 향촌에서 힘을 길러 선조 때 정치의 주도권을 잡았다(→ 서원).

네 사화와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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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 왕·연도 계기
무오사화 연산군 4년(1498)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김일손이 사초에 실은 일
갑자사화 연산군 10년(1504) 성종 때 폐비 윤씨의 죽음
기묘사화 중종 14년(1519) 조광조의 위훈 삭제 주장
을사사화 명종 즉위년(1545) 외척 대윤(윤임)과 소윤(윤원형)의 다툼

다른 옥사와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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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축옥사(1589) - 선조 때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동인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사화가 아니라 붕당 사이의 옥사이다.
  • 경신환국(1680) - 숙종 때 허적·윤휴 등 남인이 쫓겨난 사건이다(→ 숙종 (조선)).
  • 계유정난(1453) - 수양 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권력을 잡은 정변이다(→ 세조 (조선)).
  1. ↑ 기묘사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