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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 전투(公山 戰鬪)는 927년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 경주를 습격한 뒤 돌아가는 길에, 신라를 도우러 온 고려 태조 왕건의 군대를 공산 동수(지금의 대구 팔공산 일대)에서 크게 무찌른 싸움이다.

대구에 있는 신숭겸 장군 유적의 사당

공산 동수 전투라고도 한다. 925년 고려와 후백제는 인질을 주고받으며 화친했으나, 926년 고려에 인질로 가 있던 진호가 갑자기 죽자 견훤은 화친을 깨고 다시 공격에 나섰다. 927년 견훤은 근품성(문경)을 불태우고 신라의 고울부(영천)를 기습한 뒤 경주 가까이 다가갔다. 신라 경애왕이 고려에 도움을 청하자 왕건은 장수 공훤 등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보냈다.[1]

  • 경주 함락 - 고려군이 이르기 전에 견훤이 경주에 쳐들어갔다.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다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붙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강요받았다. 견훤은 왕의 친척 동생 김부를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다. 견훤은 효렴과 재상 영경 등을 사로잡고 장인과 보물을 거두어 돌아갔다. 효렴을 『고려사』는 경애왕의 아우로, 백과사전은 경순왕의 아우로 적었다.[2]
  • 공산 싸움 - 소식을 들은 왕건은 크게 노해 직접 기병 5,000명을 이끌고 공산 동수에서 돌아가는 견훤의 군대를 맞아 싸웠다. 그러나 오히려 포위되어 위급해졌고, 대장 신숭겸과 김락이 힘껏 싸우다 전사했다. 고려군은 크게 졌고 왕건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1] 신숭겸이 왕건의 갑옷을 입고 대신 싸웠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엇갈리는 날짜 - 『고려사』는 견훤의 경주 습격과 공산 싸움을 927년 9월의 일로 묶어 적었으나, 『삼국사기』 경애왕 본기는 견훤이 9월에 고울부를 치고 겨울 11월에 갑자기 왕경에 들어왔다고 적었다.[3]

이 승리로 견훤은 한때 후삼국의 주도권을 쥐었다. 그해 12월 견훤은 왕건에게 "활을 평양 다락에 걸고 말에게 대동강 물을 먹이겠다"는 편지를 보냈고, 928년에는 대야성과 강주(진주)까지 차지했다. 그러나 표면상의 화친이 완전히 깨지면서 두 나라의 전쟁은 더 치열해졌고, 930년 고창 전투에서 형세가 뒤집혔다.[2]

후삼국 통일 과정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때 사건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 건국
927년 공산 전투: 견훤이 경애왕을 죽게 하고 경순왕을 세움, 신숭겸 전사
930년 고창 전투: 김선평·권행·장길의 도움으로 고려 승리
935년 신검이 견훤을 금산사에 가둠, 견훤이 고려에 귀순, 경순왕 항복
936년 일리천 전투: 신검의 후백제군 패배, 후삼국 통일
  1. ↑ 1.0 1.1 『고려사』 권1 세가 태조 10년(927) 9월, 견훤이 신라 수도를 함락하고 만행을 저지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2. ↑ 2.0 2.1 공산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3. ↑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경애왕 4년(927), 견훤이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경순왕을 세우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