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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高麗 太祖, 877~943, 재위 918~943)는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 뒤 936년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첫 왕으로, 이름은 왕건(王建)이다.

송악(개성)의 해상 세력 출신 호족 왕륭의 아들이다. 896년 아버지와 함께 궁예에게 귀부해 장수가 되었고, 903년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 배후의 금성(나주)을 점령해 이름을 떨쳤다. 궁예 아래에서 시중에 올랐다. 918년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 등이 궁예를 몰아내고 그를 추대하자 철원 포정전에서 즉위해 나라 이름을 고려, 연호를 천수라 했다. 919년 근거지인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1]

신라에는 우호 정책을 펴고 후백제와는 맞섰다. 927년 공산 전투에서 견훤에게 크게 졌으나 930년 고창(안동) 전투에서 이겨 주도권을 잡았다. 935년 견훤이 귀순하고 신라 경순왕이 나라를 바쳤으며, 936년 일리천(지금의 구미) 전투에서 신검의 후백제군을 물리쳐 통일을 이루었다(→ 후삼국 통일). 거란에 멸망한 발해의 유민도 받아들였다.

  • 민생 안정 - 궁예 때의 가혹한 수취를 줄이고 취민유도를 내세워 세금을 수확의 10분의 1로 낮추었다. 가난한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주는 흑창을 두었다(→ 고려의 사회 제도).
  • 역분전 - 940년 통일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인품과 공로에 따라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 호족 통합 - 각지 유력 호족의 딸과 혼인했고(왕후·부인 29명), 공이 큰 호족에게 왕씨 성을 내려 주었다(사성 정책).
  • 호족 견제 - 지방 출신 고관에게 출신지의 일을 맡겨 책임지게 한 사심관 제도(경순왕 김부를 경주 사심관으로 삼은 것이 처음), 호족 자제를 개경에 머물게 한 기인 제도를 실시했다.
  • 북진 정책 - 고구려를 잇는다는 뜻에서 평양을 서경으로 삼아 중시하고 청천강~영흥만까지 영토를 넓혔다.
  • 거란 배척 - 942년 거란이 보낸 낙타 50필을 개경의 만부교 아래에 매어 굶겨 죽이고 사신을 섬으로 귀양 보냈다(만부교 사건).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라는 이유였다.
  • 정치 규범 -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신하가 지킬 도리를 밝혔고, 죽기 전 박술희를 통해 후대 왕에게 훈요 10조를 남겼다. 불교 숭상, 서경 중시, 연등회·팔관회 개최, 거란 경계 등이 담겼다.
  • 태조 왕건 청동상 - 1992년 개성의 태조 무덤(현릉) 부근에서 나온 태조의 청동상은 제후의 관이 아닌, 황제가 쓰는 통천관을 쓰고 있다. 고려가 밖으로는 책봉을 받으면서 안으로는 황제국 체제를 갖춘 모습을 보여 준다(→ 외왕내제).

다른 왕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실 인물
일리천 전투 승리, 역분전, 흑창, 사심관·기인 제도, 만부교 사건, 훈요 10조 고려 태조
광평성 설치, 국호 태봉, 철원 천도 궁예
후당·오월에 사신 파견, 공산 전투 승리 견훤
노비안검법,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 실시, 광덕·준풍 연호 광종
  1. ↑ 태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