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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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계(空城計)는 성을 비워 둔다는 뜻으로, 군사가 적을 때 일부러 성문을 열고 방비가 없는 것처럼 보여 적이 복병을 의심해 물러나게 하는 계책을 이르는 한자성어이다. 우리말샘은 “적을 빈 성으로 유인해 미궁에 빠뜨리는 계략”으로 풀이한다.[1]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諸葛亮)이 빈 성의 문루에서 거문고를 타며 사마의(司馬懿)의 대군을 물러가게 한 이야기로 널리 알려졌고, 병법서 《삼십육계》의 제32계이기도 하다.
허약한 쪽이 오히려 더 허약하게 보여, 신중한 상대가 “무슨 꾀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게 만드는 심리전이다. 상대가 의심하지 않고 밀고 들어오면 그대로 무너지므로 대담함이 필요하고, 상대가 의심이 많고 신중할수록 잘 통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올라 있지 않다.
중국어에서도 ‘空城計(kōng chéng jì)’라 하며, 대만 교육부 《성어전》은 이를 먼저 삼국 이야기를 다룬 희곡의 이름으로 풀이하고, 지금은 실력이 전혀 없으면서 허세로 남을 겁주는 것을 비유한다고 설명한다. 또 “내 배는 벌써 공성계를 부르고 있다(我的肚子早唱空城計了)”처럼 배가 고프다는 뜻으로도 쓴다.[2] 일본어에서는 ‘空城計(くうじょうけい)’, ‘空城の計’라고 한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제95회 “마속이 간언을 듣지 않아 가정을 잃고, 무후가 거문고를 타서 중달을 물리치다(馬謖拒諫失街亭,武侯彈琴退仲達)”에 나온다. 마속(馬謖)이 가정(街亭)을 잃자 제갈량은 군사를 물릴 채비를 하며 군량을 옮기러 서성(西城)에 갔는데, 사마의가 15만 대군을 이끌고 서성으로 몰려온다는 급보가 잇따랐다. 곁에는 장수 하나 없이 문관들뿐이었고, 5천 군사 중 절반은 군량을 나르러 떠나 성안에는 2,500명만 남아 있었다.
孔明傳令,教將旌旗盡皆藏匿;諸將各守城鋪,如有妄行出入,及高聲言語者,立斬;大開四門,每一門上用二十軍士,扮作百姓,灑掃街道,如魏兵到時,不可擅動,吾自有計。孔明乃披鶴氅,戴綸巾,引二小童攜琴一張,於城上敵樓前,憑欄而坐,焚香操琴。
제갈량은 깃발을 모두 감추게 하고, 함부로 드나들거나 큰 소리를 내는 자는 목을 베겠다고 했다. 네 성문을 활짝 열고 문마다 군사 스무 명을 백성처럼 꾸며 길을 쓸게 한 뒤, 자신은 학창의를 입고 윤건을 쓰고 두 동자에게 거문고를 들려 성 위 망루 앞 난간에 기대앉아 향을 피우고 거문고를 탔다. 사마의는 이 모습을 보고 “제갈량은 평생 신중하여 모험을 하지 않았다. 지금 성문을 활짝 열었으니 반드시 매복이 있다”며 군사를 물렸다. 둘째 아들 사마소(司馬昭)가 군사가 없어서 꾸민 것이 아니냐고 물었지만 듣지 않았다. 군사가 물러간 뒤 제갈량은 “나는 모험을 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쓴 것”이라 하고, 사마의가 뒤에 진상을 알고 “나는 공명만 못하다”고 탄식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3] 연의의 본문에는 ‘공성계’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제갈량의 공성계는 정사 본문에는 없고, 배송지(裴松之)가 《삼국지》 〈제갈량전〉에 단 주석에 실린 이야기에서 비롯했다. 배송지가 인용한 《촉기(蜀記)》에 따르면, 진(晉)나라 초에 부풍왕(扶風王) 사마준(司馬駿)이 관중을 다스릴 때 그 막료들이 제갈량을 깎아내리자, 금성(金城) 사람 곽충(郭沖)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제갈량의 일 다섯 가지를 들어 반박했다고 한다.[4] 그 셋째 이야기가 공성계이다.
亮屯于陽平,遣魏延諸軍並兵東下,亮惟留萬人守城。晉宣帝率二十萬眾拒亮,而與延軍錯道,徑至前,當亮六十里所,偵候白宣帝說亮在城中兵少力弱。……亮意氣自若,敕軍中皆臥旗息鼓,不得妄出菴幔,又令大開四城門,埽地卻洒。宣帝常謂亮持重,而猥見勢弱,疑其有伏兵,於是引軍北趣山。明日食時,亮謂參佐拊手大笑曰:「司馬懿必謂吾怯,將有彊伏,循山走矣。」
“제갈량이 양평(陽平)에 주둔하며 위연(魏延) 등의 군사를 동쪽으로 내려보내고 자신은 1만 명만 남겨 성을 지켰다. 사마의가 20만 군사를 이끌고 오다가 위연의 군대와 길이 엇갈려 곧장 제갈량의 앞 60리쯤에 이르렀고, 정탐병이 성안에 군사가 적고 약하다고 알렸다. …… 제갈량은 태연하게 군중에 명하여 깃발을 눕히고 북을 멈추게 하고 함부로 장막 밖에 나오지 못하게 했으며, 네 성문을 크게 열고 땅을 쓸고 물을 뿌리게 했다. 사마의는 평소 제갈량이 신중하다고 여겼는데 갑자기 약한 모습을 보이자 복병이 있을까 의심해 군사를 이끌고 북쪽 산으로 갔다. 이튿날 아침밥 때 제갈량은 참모들에게 손뼉을 치며 크게 웃으며 ‘사마의는 반드시 내가 겁을 먹은 척하며 강한 복병을 두었다고 여겨 산을 따라 달아났을 것’이라고 했다.”
배송지는 바로 이어 이 이야기를 조목조목 반박했다.[4]
- 양평은 한중(漢中)에 있는데, 제갈량이 처음 양평에 주둔할 때 사마의는 아직 형주도독으로 완성(宛城)에 있었고, 조진(曹眞)이 죽은 뒤에야 관중에서 제갈량과 맞섰다. 그 전후로 양평에서 맞붙은 일이 없다.
- 곽충의 말대로라도 사마의가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제갈량의 군사가 적다는 것까지 알았다면, 복병이 의심스러울 때 방비를 굳히고 신중히 하면 될 일이지 어찌 곧장 달아나겠는가(若疑其有伏兵,正可設防持重,何至便走乎).
- 〈위연전〉에 따르면 위연이 정병 1만을 얻어 따로 진군하겠다고 해도 제갈량은 허락하지 않았는데, 어찌 위연에게 대군을 맡겨 앞세우고 자신은 약한 군사로 남았겠는가.
- 곽충이 부풍왕 앞에서 그의 아버지인 사마의의 허물을 드러냈다는 것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으니, 이 글이 끌어댄 일은 모두 거짓임을 알 수 있다.
나무위키 등에는 배송지가 ‘정찰병 하나만 보내면 해결될 문제’라며 의심했다고 소개되기도 하지만, 배송지의 반박에 정찰병 이야기는 없고, 위와 같이 연대와 지리가 맞지 않는다는 점을 먼저 들었다. 연의는 이 이야기의 무대를 양평에서 가정 싸움 직후의 서성으로 옮기고, 땅을 쓸게 한 대목에 성루 위의 거문고를 덧붙였다.
정사의 주석에는 실제 싸움에서 비슷한 계책을 쓴 기록도 있다. 《삼국지》 〈조운전〉의 배송지 주에 인용된 《조운별전(趙雲別傳)》에 따르면, 219년 한중 쟁탈전 때 조조군이 북산(北山) 아래로 군량을 옮기자 황충(黃忠)이 이를 빼앗으러 갔다가 약속한 때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조운이 수십 기를 이끌고 나갔다가 조조의 대군과 마주쳐 싸우며 물러났는데, 조조군이 진영 앞까지 쫓아오자 진영을 닫고 지키려던 장익(張翼)과 달리 조운은 진영 문을 활짝 열었다.
雲入營,更大開門,偃旗息鼓。公軍疑雲有伏兵,引去。雲雷鼓震天,惟以戎弩於後射公軍,公軍驚駭,自相蹂踐,墮漢水中死者甚多。
“조운은 진영에 들어가 문을 더 활짝 열고 깃발을 눕히고 북을 멈추었다. 조조군은 복병이 있을까 의심해 물러갔다. 그러자 조운은 북을 하늘이 울리도록 치며 쇠뇌로 뒤에서 조조군을 쏘았고, 조조군은 놀라 서로 짓밟으며 한수(漢水)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이튿날 유비는 싸움터를 둘러보고 “자룡은 온몸이 담덩어리”라고 감탄했다.
또 《삼국지》 〈문빙전(文聘傳)〉의 주에 인용된 《위략(魏略)》에는, 손권이 수만 군사로 갑자기 쳐들어왔을 때 큰비로 성책이 무너져 손쓸 수 없던 위나라 장수 문빙(文聘)이 성안 사람들을 숨게 하고 자신도 관사에 누워 일어나지 않자, 손권이 반드시 꾀가 있거나 구원군이 올 것이라 의심해 물러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배송지는 이 기록이 본전(本傳)과 반대라고 적었다.[6]
《좌전(左傳)》 장공(莊公) 28년(기원전 666년)에는 초나라 영윤 자원(子元)이 전차 600승으로 정나라를 쳐서 성문 안 큰길 시장까지 들어갔는데, 정나라가 성문의 내리닫이 문(縣門)을 내리지 않자 초나라 군사가 초나라 말로 의논하고는 나가 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자원은 “정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했고, 제후들이 정나라를 구원하러 오자 초나라 군사는 밤에 달아났다.[7] 성문을 열어 둔 것을 보고 적이 의심해 물러난, 기록에 남은 이른 예이다.
‘공성계’라는 이름은 연의 본문이 아니라 연극에서 굳어졌다. 《성어전》은 공성계의 첫째 뜻을 제갈량이 서성을 지키는 삼국 이야기 희곡의 이름으로 든다.[2] 민국 초에 서가(徐珂)가 청나라 때의 잡사를 엮은 《청패유초(清稗類鈔)》에는 “《공성계》를 부를 때는 반드시 한가롭고 우아해야 하니, 속임수인 티를 내면 멀어진다(唱《空城計》必閒雅,若露為詐,則遠矣)”는 연기론이 실려 있다.[8]
《삼십육계》는 패전계(敗戰計)의 둘째 계책으로 공성계를 두었다.
虛者虛之,疑中生疑;剛柔之際,奇而復奇。
“빈 것을 더욱 비어 보이게 하면, 의심 속에서 의심이 생긴다. 강함과 부드러움이 맞서는 때에 쓰면 기이하고 또 기이하다.” 해설(按語)은 “빈 것을 빈 것으로 보이는 일은 제갈량 이후에도 그런 사람이 적지 않았다”며, 당나라 때 토번에 함락되었던 과주(瓜州)의 자사 장수규(張守珪)가 성을 다시 쌓던 중 적이 들이닥치자 성 위에 술자리를 벌여 적을 물러가게 한 일과, 북제의 북서주 자사 조정(祖珽)이 진(陳)나라 군사가 쳐들어오자 성문을 닫지 않고 성 위의 군사를 내려보내 거리에 사람과 닭·개의 소리마저 없게 했다가 갑자기 크게 외치고 북을 울려 적을 쫓은 일을 든다.[9] 연의의 장면을 기준으로 삼은 해설이다. 《삼십육계》는 1941년 무렵 발견된 필사본을 찍은 소책자가 1961년 소개되면서 알려진 책으로, 명나라 말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는다는 견해가 있다.[10]
- 협상 상대는 재고가 바닥났으면서도 여유 있는 척 공성계를 썼고, 우리는 그 허세에 속아 가격을 먼저 낮췄다.
- 일부러 서버 배너를 숨기고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이게 하는 것만으로는 방어가 되지 않는다. 공성계는 상대가 의심할 때만 통하고, 자동화된 스캐너는 의심하지 않는다.
- ↑ 국립국어원 우리말샘, “공성계”, https://open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focus_name=query&query=%EA%B3%B5%EC%84%B1%EA%B3%84, 확인날짜=2026-10-03.
- ↑ 2.0 2.1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空城計”,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9962, 확인날짜=2026-10-03.
- ↑ 3.0 3.1 나관중, 《삼국지연의》 제95회.
- ↑ 4.0 4.1 4.2 진수(陳壽), 《삼국지(三國志)》 권35 〈촉서·제갈량전(諸葛亮傳)〉 배송지(裴松之) 주에 인용된 《촉기(蜀記)》와 곽충(郭沖)의 다섯 가지 일.
- ↑ 진수(陳壽), 《삼국지》 권36 〈촉서·조운전(趙雲傳)〉 배송지 주에 인용된 《조운별전(趙雲別傳)》.
- ↑ 진수(陳壽), 《삼국지》 권18 〈위서·문빙전(文聘傳)〉 배송지 주에 인용된 《위략(魏略)》.
-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장공(莊公) 28년.
- ↑ 서가(徐珂), 《청패유초(清稗類鈔)》.
- ↑ 9.0 9.1 《삼십육계(三十六計)》 〈패전계(敗戰計)〉 제32계 ‘공성계’.
- ↑ 슝젠(熊建), “《三十六计》:‘地摊文学’竟成了‘国学经典’(子曰诗云)”, 《인민일보 해외판(人民日报海外版)》, 2023-09-01, 제11면, http://paper.people.com.cn/rmrbhwb/html/2023-09/01/content_26014471.htm, 확인날짜=2026-10-03.
- ↑ 참고: “「三方ヶ原の戦い」とは? 家康が大敗した理由とその後【日本史事件録】”, 사라이(サライ), https://serai.jp/hobby/1125795, 확인날짜=2026-10-03.
- ↑ 참고: “三方ヶ原の戦い古戦場”, 도켄월드(刀剣ワールド), https://www.touken-world.jp/dtl/mikatagahara/, 확인날짜=2026-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