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성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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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 전투(廣城堡 戰鬪, 1871)는 신미양요 때인 1871년(고종 8) 6월 11일(양력) 강화도 광성보에서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 수비군이 미군 상륙 부대와 싸우다 대부분 전사한 전투로, 신미양요의 가장 큰 격전이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책임을 묻고 통상을 요구하려고 미국 아시아 함대가 1871년 강화 해협으로 들어왔다. 6월 1일 손돌목 근처에서 광성보와 덕진진·덕포진의 포대가 함대를 포격해 북상을 막자, 미군은 6월 10일 초지진에 상륙해 점령하고 이튿날 덕진진을 함락한 뒤 마지막 목표인 광성보로 향했다. 광성보는 1658년(효종 9) 강화도 해안 방어를 위해 설치한 진보이다.[1][2]
진무중군 어재연은 손돌목 돈대의 지휘소에 '수(帥)' 자 깃발을 내걸고 수비군을 지휘했다. 미군은 함포로 한 시간 가까이 포격한 뒤 돌격해 왔고, 어재연과 동생 어재순을 비롯한 수비군은 백병전 끝에 대부분 전사했다. 미군은 수자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올렸다.
- 병력 - 조선 수비군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350여 명으로, 『신편 한국사』는 600명으로 적었다.
- 피해 - 미군은 전사 3명, 부상 10명이었다. 조선 측 공식 기록은 전사 53~55명, 부상 24명이지만, 미군은 광성보 일대의 시신 243구와 바다에 뛰어들어 죽은 100여 명을 합쳐 약 350명이 전사했다고 집계했다.[2]
미군은 광성보를 점령했지만 조선 정부가 협상을 거부하자 얼마 뒤 물러났다. 흥선 대원군은 서양과의 통상 거부 의지를 굳혀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 어재연은 병조 판서로 추증되었고, 광성보 안에는 1873년 어재연·어재순 형제를 기린 쌍충비와 이름 없는 전사자를 묻은 신미순의총이 있다. 광성보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