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메뉴 여닫기
환경 설정 메뉴 여닫기
개인 메뉴 여닫기
로그인하지 않음
지금 편집한다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될 수 있습니다.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는 조선 고종 8년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책임을 묻고 통상을 강요하려고 아시아 함대를 보내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으로, 광성보에서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군이 맞서 싸웠고 미군은 통상 조약을 맺지 못한 채 물러갔다.

배경: 제너럴 셔먼호 사건

편집 원본 편집

1866년 7월(음력)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와 통상을 요구했다. 거절당하자 조선 관리를 붙잡아 가두고 민가를 약탈하며 총을 쏘았다. 이에 평안 감사 박규수의 지휘 아래 평양 관민이 배에 불을 질러 침몰시키고 선원을 모두 죽였다. 미국은 이 일을 따지고 조선과 통상 관계를 맺으려 원정을 계획했다.[1]

  • 함대 출동 - 1871년 주청 미국 공사 로우와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이 기함 콜로라도호 등 군함 5척, 병력 1,200여 명을 이끌고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인천 앞바다로 왔다.
  • 손돌목 포격 - 미국 함대가 조선의 허락 없이 강화해협을 측량하며 거슬러 오르자, 손돌목에서 강화 포대가 포격을 가했다. 미국은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으나 조선은 영토 침범이라며 거부했다.
  • 초지진·덕진진 점령 - 미군은 상륙 작전으로 초지진을 함포로 초토화해 점령하고 이어 덕진진을 차지했다.
  • 광성보 전투 - 진무중군 어재연이 이끄는 600여 명의 조선군이 광성보에서 끝까지 싸웠으나 어재연 형제를 비롯해 많은 병사가 전사했다. 미군은 어재연의 장군기인 수자기(帥字旗)를 빼앗아 갔다(2007년 장기 대여 형식으로 돌아옴).
  • 철수 - 조선이 끝내 협상에 응하지 않자 미군은 조약을 맺지 못하고 한 달여 만에 물러갔다.
  • 흥선 대원군은 미군의 철수를 승리로 여기고 척화비를 서울 종로와 전국 각지에 세웠다. 비문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이 더욱 굳어졌다. 척화비는 1882년 임오군란 뒤 흥선 대원군이 청에 끌려가면서 대부분 뽑혔다.
  • 조선과 미국은 1882년 청의 주선으로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맺어 서양 나라 가운데 처음으로 수교했다. 거중 조정과 최혜국 대우 조항이 담겼고, 이듬해 조선은 보빙사를 미국에 보냈다.

서양 세력의 침략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실 나라·사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침입, 어재연의 광성보 항전 미국 (신미양요, 1871)
병인박해를 구실로 침입, 양헌수의 정족산성 승리, 외규장각 도서 약탈 프랑스 (병인양요, 1866)
거문도를 불법 점령 영국 (거문도 사건, 1885)
용암포 조차를 요구 러시아 (용암포 사건, 1903)
운산 금광 채굴권 획득 미국(1896)
  1. ↑ 신미양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