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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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는 조선 고종 8년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책임을 묻고 통상을 강요하려고 아시아 함대를 보내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으로, 광성보에서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군이 맞서 싸웠고 미군은 통상 조약을 맺지 못한 채 물러갔다.
- 함대 출동 - 1871년 주청 미국 공사 로우와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이 기함 콜로라도호 등 군함 5척, 병력 1,200여 명을 이끌고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인천 앞바다로 왔다.
- 손돌목 포격 - 미국 함대가 조선의 허락 없이 강화해협을 측량하며 거슬러 오르자, 손돌목에서 강화 포대가 포격을 가했다. 미국은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으나 조선은 영토 침범이라며 거부했다.
- 초지진·덕진진 점령 - 미군은 상륙 작전으로 초지진을 함포로 초토화해 점령하고 이어 덕진진을 차지했다.
- 광성보 전투 - 진무중군 어재연이 이끄는 600여 명의 조선군이 광성보에서 끝까지 싸웠으나 어재연 형제를 비롯해 많은 병사가 전사했다. 미군은 어재연의 장군기인 수자기(帥字旗)를 빼앗아 갔다(2007년 장기 대여 형식으로 돌아옴).
- 철수 - 조선이 끝내 협상에 응하지 않자 미군은 조약을 맺지 못하고 한 달여 만에 물러갔다.
- 흥선 대원군은 미군의 철수를 승리로 여기고 척화비를 서울 종로와 전국 각지에 세웠다. 비문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이 더욱 굳어졌다. 척화비는 1882년 임오군란 뒤 흥선 대원군이 청에 끌려가면서 대부분 뽑혔다.
- 조선과 미국은 1882년 청의 주선으로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맺어 서양 나라 가운데 처음으로 수교했다. 거중 조정과 최혜국 대우 조항이 담겼고, 이듬해 조선은 보빙사를 미국에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