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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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는 조선 고종 3년 흥선 대원군이 프랑스 선교사와 천주교도를 처형한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으로, 양헌수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으나 프랑스군은 물러나면서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해 갔다.
1866년 초 흥선 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프랑스의 힘으로 막으려다 뜻대로 되지 않고 천주교 배척 여론이 높아지자 천주교 금압령을 내렸다(병인박해). 이때 조선에 있던 프랑스 선교사 12명 가운데 9명과 수많은 조선인 신자가 처형되었다. 탈출한 리델 신부가 이 소식을 청의 톈진에 있던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알렸고, 프랑스는 보복 원정을 결정했다.[1]
- 1차 원정 - 1866년 9월(양력) 로즈가 군함 3척을 이끌고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서강 부근까지 올라와 지형을 정찰하고 돌아갔다.
- 2차 원정과 강화부 점령 - 10월 군함 7척과 병력 1,000여 명으로 다시 와 강화부를 점령했다. 선교사 학살의 책임자 처벌과 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 문수산성 전투 - 한성근이 이끄는 조선군이 김포 문수산성에서 맞섰으나 화력에 밀렸다.
- 정족산성 전투 - 천총 양헌수가 500여 명의 포수를 이끌고 밤에 몰래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에 들어갔다. 11월 프랑스군이 공격해 오자 매복했다가 격퇴했다. 서양 군대를 물리친 첫 승리로 평가된다.
- 철수와 약탈 - 패배한 프랑스군은 곧 강화도에서 물러나면서 외규장각에 보관된 의궤를 비롯한 도서 340여 권과 은괴 등을 빼앗아 가고 나머지 건물과 책을 불태웠다.
- 흥선 대원군은 서양 세력을 물리쳤다고 여겨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굳혔다. 천주교 박해도 한층 거세졌다.
-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 1871년 신미양요가 이어지며 배외 감정이 높아졌다.
- 약탈된 외규장각 의궤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오다가, 박병선 박사가 그 존재를 알린 뒤 오랜 협상 끝에 2011년 대여 형식으로 돌아왔다.
1886년 조선과 프랑스는 조프 수호 통상 조약(한불 수호 통상 조약)을 맺었다. 병인박해 이후 20년 만의 조약으로, 언어·문자를 가르칠 수 있게 한 '교회'(敎誨) 조항을 근거로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 사실 | 나라·사건 |
|---|---|
| 병인박해를 구실로 강화도 침략, 외규장각 도서 약탈 | 프랑스 (병인양요, 1866) |
|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침입, 광성보 전투 | 미국 (신미양요, 1871) |
| 러시아 견제를 내세워 거문도를 불법 점령 | 영국 (거문도 사건, 1885~1887) |
| 용암포를 점령하고 조차를 요구 | 러시아 (용암포 사건, 1903) |
| 운산 금광 채굴권을 차지 | 미국(1896) |
| 남연군 묘 도굴 시도 | 독일 상인 오페르트(1868, 오페르트 도굴 사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