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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은 아들 고종이 즉위한 1863년부터 10년 동안 섭정하며 세도 정치를 누르고 왕권 강화 개혁을 폈고, 대외적으로는 통상 수교를 거부하고 척화비를 세운 조선 말기의 정치가로, 이름은 이하응(李昰應)이다.

영조의 현손인 남연군의 아들이다. 안동 김씨 세도 아래 왕족으로서 몸을 낮추고 지내다가,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 대비(신정 왕후)와 손잡고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위에 올렸다. 이가 고종이며, 대원군은 어린 왕을 대신해 실권을 쥐었다. 1873년 최익현의 탄핵 상소를 계기로 물러났다.[1]

  • 인재 등용 -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내고 당파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썼다.
  • 통치 체제 정비 - 비변사를 없애 의정부의 기능을 되살리고 삼군부를 부활해 정무와 군무를 나누었다. 『대전회통』(1865)과 『육전조례』(1867)를 펴내 법전을 정리했다.
  • 경복궁 중건(1865~1868) -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을 다시 지었다. 비용을 대려고 원납전을 강제로 걷고, 도성 문을 드나드는 사람에게 문세를 받았으며, 실제 가치가 낮은 당백전을 찍어 물가가 크게 올랐다. 백성을 공사에 동원하고 양반의 묘지림까지 베어 원성을 샀다.
  • 서원 철폐 - 붕당의 근거지이자 면세·면역의 특권을 누리던 서원을 정리했다. 1865년 만동묘를 없애고, 1871년 사액 서원 47곳만 남기고 모두 철폐해 양반 유생의 큰 반발을 샀다.
  • 삼정 개혁 - 숨은 토지를 찾아내 세금을 매기고(전정), 양반에게도 군포를 걷는 호포제를 실시했으며(군정), 환곡의 폐단을 줄이려 마을 단위로 운영하는 사창제를 도입했다(환정).
  • 병인박해(1866) -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수많은 천주교도를 처형했다. 이것이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 -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린 미국 상선을 평양 관민이 불태웠다.
  •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 -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했다. 서양에 대한 반감이 더 커졌다.
  • 척화비 건립 - 1871년 신미양요를 물리친 뒤 서울 종로와 전국 각지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뜻의 척화비를 세웠다.
  • 1882년 임오군란 때 다시 정권을 잡아 통리기무아문과 별기군을 없앴으나, 한 달여 만에 청군에게 붙잡혀 톈진으로 끌려갔다가 1885년 돌아왔다.
  •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뒤 일본에 의해 다시 추대되었으나 곧 물러났다(→ 갑오개혁).
  •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에 이용되었다(→ 을미사변).

다른 때의 일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실 때
경복궁 중건, 서원 철폐, 호포제, 척화비 건립 흥선 대원군 집권기(1863~1873)
영정법·대동법·균역법으로 수취 제도 개편 조선 후기(인조~영조)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천주교 탄압 강화 신유박해(1801, 순조)
통리기무아문 설치, 별기군 창설 고종 친정기(통리기무아문, 1880~1882)
  1. ↑ 이하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