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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대단지 사건(廣州大團地事件, 1971)은 1971년 8월 10일 서울시가 철거민을 옮겨 살게 한 경기도 광주 대단지(지금의 성남시) 주민 수만 명이 무계획한 이주 정책과 땅값 일시 상환 요구에 맞서 벌인 대규모 도시 빈민 항쟁이다.

1971년 8월 10일 광주 대단지 사건 현장(서울역사박물관)

1960년대 산업화로 서울에 사람이 몰리자 무허가 판자촌이 크게 늘었다. 서울시는 이를 정리하려고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일대(지금의 성남시 수정구·중원구)에 대단지를 만들고, 1969년 5월부터 철거민을 옮겨 살게 했다. 2년 만에 1만 8천여 세대, 6만 6천여 명이 들어왔다. 그러나 상하수도·도로·일자리 같은 기반 시설은 거의 없었다.[1]

  • 땅값 문제 - 처음에는 한 세대에 20평을 평당 2,000원에 주고 나누어 갚게 했다. 1971년 총선 무렵 분양권 전매로 투기 바람이 일었는데, 선거가 끝나자 서울시는 전매를 금지하고 전매 입주자에게 평당 8,000~16,000원을 한꺼번에 내라고 통보했다. 여기에 세금까지 매기자 주민의 불만이 폭발했다.[2]

주민들은 1971년 7월 대책 위원회를 꾸려 땅값 인하와 분할 상환, 구호 대책을 요구했고, 서울시가 답하지 않자 투쟁 위원회로 바꾸었다. 8월 10일 궐기 대회에 서울시장이 약속과 달리 나타나지 않자, 성난 주민들이 출장소와 파출소 등을 부수고 불태우며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고 차량을 빼앗아 서울로 가려 했다. 약 6시간 뒤 서울시장이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밝히면서 시위는 해산했다.

  • 참가 인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최소 3만에서 최대 6만으로 보고, 민주화운동사전은 본문에서 3만여 명, 개요에서 5만여 명으로 적어 수치가 엇갈린다.
  • 피해 - 주민과 경찰 100여 명이 다쳤고, 주동자로 몰린 20여 명이 구속되었다.

서울시는 전매 입주자의 땅값을 철거민과 같은 평당 2,000원으로 내리고, 구호 양곡 지급·세금 면제·공장 유치를 약속했다. 대단지는 1973년 성남시로 승격되었다. 이 사건은 6.25 전쟁 뒤 처음 일어난 대규모 도시 빈민 항쟁으로, 고도성장 뒤에 가려진 도시 빈민 문제를 드러냈으며 학생·종교계의 빈민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1]

1970년대 전후 사회 문제와 정책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일 때 내용
전태일 분신 1970 평화 시장 노동자가 근로 기준법 준수 요구
광주 대단지 사건 1971 철거민 이주지 주민의 생존권 항쟁
개발 제한 구역 첫 지정 1971 도시의 무질서한 팽창을 막으려 서울 외곽에 그린벨트 지정
YH 무역 사건 1979 여성 노동자의 신민당사 농성
  1. ↑ 1.0 1.1 광주대단지사건, 민주화운동사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26-10-19 확인.
  2. ↑ 광주대단지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