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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부(朴正熙政府, 1963~1979)는 5·16 군사 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가 1963년 대통령에 취임한 뒤 1979년 10·26 사건으로 숨질 때까지 이어진 정부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앞세운 고도성장과 유신 체제의 장기 독재가 함께 진행되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인들이 장면 내각을 무너뜨리고(5·16 군사 정변) 국가 재건 최고 회의를 세워 군정을 폈다. 1962년 대통령 중심제 개헌을 거쳐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당선되면서 제3공화국이 출범했다. 1969년 3선 개헌으로 세 번째 임기를 열었고, 1972년 10월 유신으로 제4공화국(유신 체제)을 세웠다. '조국 근대화'와 반공을 내세워 수출 중심 공업화를 밀어붙였으나 민주주의와 인권은 크게 억압되었다.[1]

  •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 1961년 7월 세운 경제기획원이 계획을 주도했다. 제1차 계획(1962~1966)은 군정 시기에 시작되어 전력·석탄 등 기간산업과 수출 증대에 힘썼다. 제2차(1967~1971)는 경공업 수출, 제3·4차(1972~1981)는 철강·조선·화학 등 중화학 공업을 중심으로 했다.[2]
  • 서독 광부·간호사 파견 - 1963년부터 광부를, 1966년 무렵부터 간호사를 서독에 보냈다. 이들이 보낸 돈은 외화가 부족하던 경제 개발의 밑천이 되었다.
  • 외자 도입 - 1965년 한일 기본 조약으로 받은 청구권 자금, 1964년부터 시작된 베트남 파병과 1966년 브라운 각서에 따른 미국의 지원이 공업화 자금으로 쓰였다.
  • 성과 - 1970년 경부 고속 국도 개통, 1973년 포항 제철소 1기 준공, 1974년 서울역~청량리역 사이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1977년 수출 100억 달러 달성.
  • 행정 수도 건설 계획 - 수도권 인구 집중을 줄이려고 1977년 임시 행정 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 조치법을 만들고, 충청남도 공주군 장기면 일대를 후보지로 하는 백지 계획을 세웠다. 1979년 박정희가 죽으면서 중단되었다. 1970년에는 수출 자유 지역 설치법에 따라 마산이 수출 자유 지역으로 지정되었고, 포항 종합 제철 1기 설비도 이해 착공되었다. 1971년 서울 둘레에 처음으로 개발 제한 구역(그린벨트)을 지정했고, 1974년 서울역~청량리 사이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었다. 차수별 계획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고속 도로 건설은 경부 고속 도로 문서에 있다.
  • 새마을 운동 - 1970년 시작된 농촌 근대화 운동으로 '근면·자조·협동'을 내세웠다.
  • 베트남 파병 -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연인원 30만여 명을 보냈다. 파병과 브라운 각서의 내용은 베트남 파병 문서에 있다.
  • 그늘 - 저임금·장시간 노동이 이어졌고, 1970년 평화 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 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했다. 1976~1978년에는 인천 동일방직의 여성 노동자들이 민주 노조를 지키려다 똥물 사건 등 탄압을 받았고(동일방직 사건), 전라남도 함평 농민들은 1978년 단식 농성 끝에 고구마 수매 피해 보상을 받아 냈다(함평 고구마 피해 보상 운동).
  • 도시 문제 - 서울 철거민을 옮겨 살게 한 경기도 광주 대단지에서 1971년 주민들이 땅값 일시 상환 요구와 열악한 환경에 맞서 광주 대단지 사건을 일으켰다. 같은 해 정부는 도시의 무질서한 팽창을 막으려 서울 외곽에 처음으로 개발 제한 구역(그린벨트)을 지정했다.
  • 한일 국교 정상화 - 굴욕 외교라는 반대 속에 1964년 6.3 시위가 일어났고 잡지 『사상계』도 반대 논조를 폈으나, 정부는 비상계엄으로 누르고 1965년 한일 기본 조약을 맺었다.
  • 1·21 사태(1968) - 북한 무장 공비의 청와대 습격 시도를 계기로 향토 예비군을 창설했다.
  • 3선 개헌(1969) - 대통령의 연임을 세 번까지 허용하도록 헌법을 고쳤다. 국회 제3별관에서 여당 의원만으로 변칙 통과시킨 뒤 국민 투표로 확정했다(→ 3선 개헌).
  • 10월 유신(1972) - 비상계엄 아래 국회를 해산하고 유신 헌법을 만들었다. 대통령은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간접 선거로 뽑고 임기는 6년에 연임 제한이 없었으며, 긴급 조치권·국회 해산권과 국회의원 3분의 1 추천권을 가졌다.
  • 유신 반대 운동 - 개헌 청원 100만 인 서명 운동(1973), 민청학련 사건(1974), 3·1 민주 구국 선언(1976) 등이 이어졌고 정부는 긴급 조치로 탄압했다. 명동 성당에서 발표된 선언의 내용과 처벌은 3.1 민주 구국 선언 문서에 있다.
  • 1971년 남북 적십자 회담 제의로 대화가 시작되었고,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으로 자주·평화·민족적 대단결의 3대 통일 원칙에 합의하고 남북 조절 위원회를 설치했다.
  • 1973년 6·23 평화 통일 외교 정책 선언으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1979년 YH 무역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과 강제 해산, 신민당 총재 김영삼의 국회의원 제명이 이어지자 10월 부마 민주 항쟁이 일어났다. YH 무역 노동자 농성의 경위는 YH 무역 사건 문서에 있다. 시위 대응을 둘러싼 갈등 속에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쏘아 죽이면서(10·26 사건) 유신 체제가 무너졌다.

다른 정부의 정책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실 정부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추진, 서독에 광부 파견 박정희 정부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박정희 정부
6개 구단으로 프로 야구 출범(1982), 첫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 교환(1985) 전두환 정부
소련(1990)·중국(1992)과 수교,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노태우 정부
금융 실명제, 지방 자치 단체장까지 뽑는 지방 자치제 전면 실시(1995) 김영삼 정부
국민 기초 생활 보장법 시행, 6·15 남북 공동 선언 김대중 정부
개성에 남북 경제 협력 협의 사무소 설치 노무현 정부
반민족 행위 처벌법 제정(1948) 이승만 정부 (→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
외환 위기 극복을 위한 금 모으기 운동(1998) 김대중 정부
한·중 자유 무역 협정(FTA) 서명(2015) 박근혜 정부
  1. ↑ 박정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2. ↑ 경제개발계획,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