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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미·효심의 난(1193~1194)은 고려 명종 때 김사미가 운문(경상북도 청도), 효심이 초전(울산)을 근거지로 일으켜 경상도 일대를 휩쓴 농민 봉기이다.

무신 정변 뒤 집권 무신들이 사적인 지배 기반을 넓히며 수탈을 늘리자 지방의 불만이 커졌다. 이의민이 권력을 쥐고 있던 1193년(명종 23) 7월, 남쪽에서 봉기가 일어나 김사미는 운문에, 효심은 초전에 웅거하며 떠도는 무리를 모아 주현을 공격했다. 조정은 이들을 남적이라 불렀다. 김사미는 '사미'라는 이름으로 보아 운문사에 딸린 승도였을 가능성이 있다.[1]

  • 토벌군의 패배 - 8월 대장군 전존걸이 이끄는 토벌군이 여러 번 졌다. 『고려사』 이의민 열전은 함께 출전한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이 봉기군과 내통해 옷과 식량을 대 주고 작전 기밀을 흘렸다고 전한다. 전존걸은 이지순을 처벌할 수도 놓아둘 수도 없는 처지에 몰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토벌군 재편 - 11월 상장군 최인을 남로착적병마사로 삼아 다시 군대를 보냈고, 12월 봉기군 두령 득보가 항복을 청했다.
  • 김사미의 최후 - 1194년(명종 24) 2월 김사미가 스스로 관군 진영에 와서 항복했으나 곧바로 목이 베였다.
  • 효심의 최후 - 효심의 무리는 밀성(밀양) 싸움에서 7,000여 명이 죽는 큰 타격을 입었고, 1194년 4월 효심이 붙잡혀 봉기가 끝났다.[2]

이의민 내통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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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는 경주 출신 이의민이 신라 부흥을 꿈꾸며 봉기군과 내통했다고 적었다. 백과사전은 이미 최고 집정자였던 이의민이 봉기 세력과 결탁하려 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고, 자신의 출신 지역이 봉기의 근거지였기 때문에 진압에 소극적이었던 것이 내통 의심을 산 것으로 해석한다. 이 일은 1196년 이의민이 최충헌에게 제거되는 계기의 하나가 되었다.[1]

  1. ↑ 1.0 1.1 김사미의 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2. ↑ 김사미의 난, 사료로 본 한국사,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고려사』 권20 세가 명종),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