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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집권기의 민란은 1170년 무신 정변 뒤 고려 각지에서 농민·소민·노비 등이 수탈과 신분 차별에 맞서 일으킨 봉기를 함께 이르는 말로, 망이·망소이의 난, 김사미·효심의 난, 만적의 난 등이 대표적이다.

무신 정변(1170) 뒤 무신들이 권력 다툼을 벌이며 땅을 넓히고 백성을 수탈하자 지방 통제가 느슨해지고 백성의 불만이 커졌다. 하급 무신이나 천민 출신이 권력을 잡는 모습(이의민 등)을 보면서 신분 질서에 대한 생각도 흔들렸다. 그 결과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초까지 크고 작은 봉기가 잇달았다. 이들 봉기는 수탈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해 신분 해방과 정권 장악, 옛 나라의 부흥을 내세우는 데까지 나아갔다.[1]

  • 망이·망소이의 난(1176) -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가 소민을 이끌고 일어났다. 소(所)는 특정 물품을 만들어 바치던 특수 행정 구역으로, 주민은 일반 군현민보다 무거운 부담을 졌다. 이들이 공주를 점령하자 정부는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올려 달랬다. 그러나 곧 가족을 가두는 등 약속을 어겨 다시 일어났고, 아산·청주 일대까지 점령했다가 1177년 진압되었다. 충순현도 다시 명학소로 떨어졌다.
  • 전주 관노의 난(1182) - 전주에서 관노들이 가혹한 사역에 반발해 일어났다.
  • 김사미·효심의 난(1193) - 김사미는 운문(경북 청도), 효심은 초전(울산)에서 일어나 연합했다. 신라 부흥을 꿈꾸던 경주 출신 집권자 이의민과 그 아들이 몰래 내통해 토벌군이 여러 번 패했으나, 1194년까지 모두 진압되었다.[2]
  • 만적의 난(1198) - 최충헌의 사노비 만적이 개경 북산에서 노비들을 모아 "장수와 재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라며 신분 해방과 정권 장악을 꾀했다.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최충헌 등을 죽이려 했으나, 율학박사 한충유의 노비 순정의 고발로 실패해 100여 명이 죽임을 당했다.[3]
  • 삼국 부흥 운동 - 1202년 경주에서 신라 부흥, 1217년 서경에서 최광수의 고구려 부흥, 1237년 담양에서 이연년의 백제 부흥을 내건 봉기가 일어났다.

무신 정권에 맞선 문신·무신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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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과 별개로 무신 정권 초기에는 정권에 맞선 관리의 반란도 있었다.

  • 김보당의 난(1173) -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이 쫓겨난 의종을 다시 세우려 했다.
  • 조위총의 난(1174) - 서경 유수 조위총이 정중부 등을 치려고 일어났다.
  • 교종 승려의 난(1174) - 귀법사 등 개경 사원의 승려들이 무신 정권에 맞섰다.

다른 시기의 봉기·사회 모습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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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시기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 봉기, 개경에서 만적이 봉기 도모 무신 집권기 (12세기 후반)
지배층에서 변발과 호복이 유행 원 간섭기 (13세기 후반~14세기)
서경 천도를 주장하며 묘청이 봉기(1135) 문벌 귀족 사회 (→ 묘청의 난)
왕조 교체를 예언하는 예언서 유포 조선 후기 (→ 정감록)
서얼이 통청 운동 전개 조선 후기 (→ 서얼)
  1. ↑ 망이·망소이의 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2. ↑ 김사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3. ↑ 만적의 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