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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조선 후기 금석학과 고증학을 이끌고 추사체라는 독창적인 서체를 완성했으며, 제주 유배 중에 「세한도」를 그린 문신·학자·서화가이다.

김정희가 제주 유배 중에 그린 「세한도」(1844, 국보)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 등이고 충청도 예산 출신이다. 어려서 북학파 박제가에게 배웠고, 1809년 동지부사였던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청의 연경(베이징)에 가서 옹방강·완원 같은 청의 대학자들과 사귀었다. 이후 청의 고증학을 받아들여 사실을 근거로 진리를 찾는다는 실사구시의 학문을 펼쳤다. 1819년 문과에 급제해 규장각 대교, 충청도 암행어사, 병조 참판 등을 지냈다.[1]

  • 금석학 - 옛 비석과 금속에 새긴 글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1816년 북한산 비봉의 비석을 조사해 그것이 무학 대사의 비가 아니라 신라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혔고, 황초령비도 고증했다. 그 연구를 『금석과안록』(예당금석과안록)에 남겼다.
  • 고증학·경학 - 『실사구시설』에서 청 학자들의 학설을 자기 경험과 사유로 소화해 실증을 중시하는 학문 태도를 밝혔다.
  • 불교 - 초의 선사·백파 선사 등 승려와 깊이 사귀며 논쟁했다. 세상을 떠나던 해 봉은사에 남긴 현판 「판전」이 유명하다.
  • 추사체 - 역대 서법을 두루 익힌 뒤 특히 옛 예서를 깊이 연구해, 굵고 가는 획과 파격적인 짜임을 지닌 자기만의 글씨를 만들었다. 제주 유배기를 거치며 완성되었다.
  • 「세한도」(국보) - 1844년 제주 유배 중에 그렸다. 귀양 간 스승을 잊지 않고 청에서 귀한 책을 구해 보내 준 제자인 역관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담아 그려 준 그림이다. 허름한 집 한 채와 소나무·잣나무를 그리고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는 『논어』 구절을 제목으로 삼았다. 사실 묘사보다 마음속 뜻을 드러내는 문인화의 대표작이다.
  • 「불이선란도」 - 난초를 그리고 그 둘레에 글을 빽빽이 써 넣은 묵란화이다. 자기 서예 필법으로 난을 친 그림으로, 그림 속 글과 여러 도장을 통해 그의 예술관과 소장자의 변동을 알 수 있다.
  • 제주 유배(1840~1848) - 윤상도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 대정현에 위리안치되었다. 9년 가까운 유배 생활 동안 학문과 글씨가 더욱 깊어져 추사체와 「세한도」가 이때 나왔다.
  • 북청 유배(1851~1852) - 다시 정치 다툼에 휘말려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 풀려난 뒤 과천에서 지내다가 1856년 세상을 떠났다.

조선 후기 화가와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작품 화가
「세한도」, 「불이선란도」, 추사체 김정희
「월하정인」, 「단오풍정」 등 양반의 풍류와 남녀의 정 신윤복 (→ 조선의 회화)
「씨름」, 「서당」 등 서민의 일상, 산수화 김홍도 (→ 조선의 회화)
고양이가 병아리를 물고 달아나는 「파적도」 김득신 (→ 조선의 회화)
「인왕제색도」, 「금강전도」 등 진경산수화 정선 (→ 조선의 회화)
안평 대군의 꿈을 그린 「몽유도원도」 안견(조선 전기, → 조선의 회화)
  1. ↑ 김정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