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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청에 다녀온 뒤 『북학의』를 지어 청 문물 수용과 상공업 진흥, 소비를 통한 생산 자극을 주장한 북학파 학자이다.

호는 초정(楚亭)·정유(貞蕤)이다. 승지 박평의 서자로 태어난 서얼이었다. 젊어서 박지원에게 배우고 이덕무·유득공·이서구 등과 백탑 근처에서 어울렸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처음 청에 가서 이조원·반정균 등 청의 학자들과 사귀었다. 이후 1790년에 두 차례, 1801년에 한 차례 더 청에 다녀와 모두 네 번 연행했다.[1]

규장각 검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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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1777년 서얼허통절목을 내려 서얼의 벼슬길을 넓히고, 1779년 규장각에 검서관을 두어 박제가·이덕무·유득공·서이수 등 서얼 출신 학자를 임명했다. 이들을 4검서라 한다. 박제가는 13년 동안 규장각에서 책을 교정·간행하며 학문을 넓혔다. 또 정조의 명으로 이덕무·백동수와 함께 군사 무예 24기를 그림과 함께 정리한 『무예도보통지』 편찬에 참여했다. 정조가 죽은 뒤 1801년 흉서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다.

1778년 첫 연행에서 돌아와 지은 책으로, '북학파'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 북학의). 내편과 외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박제가가 직접 쓰고 엮은 고본은 스승 박지원의 친필 서문과 함께 남아 202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2]

  • 내편 - 수레·배·벽돌·기와·도로·다리 등 생활 도구와 시설을 청처럼 고치자고 했다.
  • 외편 - 농업·과거·관리·재정·통상 등 제도의 문제와 개혁 방안을 다루었다.
  • 소비론(우물론) - 재물은 우물과 같아서 퍼 쓰면 다시 차고 버려 두면 마른다고 비유했다. 검소함만 강조하는 대신 적절한 소비가 생산을 자극한다고 보아, 소비 억제를 내세운 기존 학자들과 달랐다.
  • 수레와 선박 - 수레를 쓰고 배를 이용해 물자를 유통해야 한다고 했다. 청과 바닷길로 통상하자는 주장도 폈다.
  • 양반의 상업 종사 - 놀고먹는 양반에게 장사를 하게 하자고 했다.

1798년에는 『북학의』를 간추린 『진소본 북학의』를 정조에게 올렸다.

북학파 학자들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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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저술 인물
『북학의』, 소비 촉진을 통한 생산력 증대, 규장각 검서관 박제가
『의산문답』에서 지전설·무한 우주론 주장 홍대용
「양반전」으로 양반 풍자, 『열하일기』 박지원
『지구전요』로 세계 지리와 자연 현상 소개 최한기
『발해고』에서 남북국이라는 말을 처음 씀 유득공 (→ 발해고)
『청장관전서』,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
『기기도설』을 참고해 거중기 고안, 『목민심서』 정약용
양명학 연구, 강화학파 형성 정제두
추사체 창안, 「세한도」 김정희
「지부복궐척화의소」, 왜양일체론 최익현
  1. ↑ 박제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2. ↑ 북학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