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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羅雲奎, 1902~1937)는 일제 강점기의 영화인으로, 1926년 직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 「아리랑」을 단성사에서 개봉해 식민 지배 아래 한국인의 고통과 저항 의식을 그려 냈다.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간도의 명동 학교 등에서 공부했고, 3.1 운동 뒤 독립군 단체와 관련을 맺었다가 철도 터널 폭파 미수 사건의 용의자로 붙잡혀 1년 6개월 옥살이를 하고 1923년 풀려났다. 1924년 부산에 세워진 조선 키네마 주식회사에 연구생으로 들어가 배우가 되었고, 「심청전」(1925)의 심 봉사 역, 「농중조」(1926)로 이름을 얻은 뒤 같은 해 「아리랑」을 내놓았다.[1]

  • 개봉 - 1926년 10월 서울 종로의 영화관 단성사에서 처음 상영되었다. 무성 영화여서 변사가 줄거리를 풀어 주었다.
  • 줄거리 - 3.1 운동 때 충격으로 정신이 이상해진 대학생 영진이,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하는 오기호가 누이동생을 욕보이려 하자 낫으로 그를 죽이고 일본 순사에게 끌려간다. 영진이 끌려가는 마지막 장면에 민요 아리랑이 흐른다.
  • 의미 - 검열을 피해 우회적으로 표현했지만 관객들은 식민 지배에 대한 울분과 저항을 읽어 냈다. 큰 흥행을 거두었고, 주제가 아리랑이 전국에 퍼졌다.

그 뒤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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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풍운아」도 직접 쓰고 감독·주연을 맡았다. 1927년 나운규 프로덕션을 세워 「옥녀」·「사나이」·「사랑을 찾아서」 등을 만들었다. 영화 활동 약 15년 동안 29편을 만들었고, 그중 15편은 각본·감독·주연을 모두 맡았다. 「벙어리 삼룡」(1929)도 대표작이다. 경영난과 건강 악화를 겪으면서도 유성 영화 「아리랑 3편」(1936), 「오몽녀」(1937)를 만들었고, 1937년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같은 시기 문화계와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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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시기
「아리랑」 단성사 개봉, 경성 제국 대학 설립 1926년 무렵 (나운규)
신경향파 작가들이 계급 문학 단체를 만듦 1925~1935년 (카프)
원각사에서 이인직의 「은세계」 공연 1908년 (원각사)
토월회의 신극 운동 1923년 이후 (토월회)
덕수궁 석조전 신축 1900~1910년 (덕수궁 석조전)
  1. ↑ 나운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