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의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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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의 옥(南怡의 獄)은 1468년(예종 즉위년) 유자광의 고변으로 무신 남이와 강순 등이 역모 죄로 처형된 사건이다.
남이(1441~1468)는 태종의 외손자로, 1467년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고 같은 해 건주 여진을 치는 데 공을 세워 세조의 총애 속에 20대에 병조 판서에 올랐다. 1468년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강희맹·한계희 등 훈구 대신들이 그가 병조 판서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평소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예종은 그를 겸사복장으로 옮겼다.[1]
1468년 10월 24일 밤 병조 참지 유자광이 승정원에 나아가 급히 아뢸 일이 있다며 예종을 만났다. 그는 내병조에서 함께 숙직할 때 남이가 찾아와, 나라에 큰 상사가 있어 인심이 흔들리니 간신이 난을 일으키면 개죽음을 당할 것이라며 함께 충성을 다해 세조의 은혜를 갚자고 했고, 김국광·노사신 같은 자는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고 고했다.[2] 혜성이 나타난 것을 두고 남이가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펼 징조"라고 했다는 말도 증거가 되었다. 국문 끝에 남이와 영의정을 지낸 강순 등이 자백해 처형되고, 관련자 수십 명이 죽거나 노비가 되었다.
조선 전기 기록은 남이를 반역자로 보았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연려실기술』 등 야사는 남이의 재능과 명성을 시기한 유자광이 말을 꾸며 모함한 사건으로 그렸고, 남이를 억울하게 죽은 젊은 영웅으로 묘사했다. 백과사전은 이런 인식이 무오·갑자사화의 책임을 유자광에게 돌린 후대의 시각과 관련이 있다고 보며, 세조 때 성장한 무인 세력이 훈구 대신을 견제하려 한 사건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남이는 순조 때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의 상소로 신원되었다.[1]
- ↑ 1.0 1.1 남이의 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 ↑ 『예종실록』 예종 즉위년 10월 24일, 유자광이 남이의 역모 사실을 고하니 남이를 붙잡아 실상을 묻다,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