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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대토벌 작전(南韓大討伐作戰, 1909)은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일본군이 당시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하던 전라남북도의 의병을 없애려고 벌인 대규모 진압 작전으로, 이 작전 뒤 국내 의병은 크게 꺾이고 남은 세력은 만주·연해주로 옮겨 독립군으로 이어졌다.

일본 측 문서의 이름은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이다. 항일 의병 운동 가운데 정미의병 이후 호남은 의병 투쟁의 중심지였다. 1909년 상반기에는 전국 의병 전투 횟수의 절반 가까이(47.3%)가 호남에서 벌어졌다. 동학 농민 운동의 본거지로 반일 의식이 강했고, 러일 전쟁 전후 일본인의 토지 침탈이 심했던 것이 배경으로 꼽힌다. 일본은 호남 의병을 꺾지 않고는 의병을 진압할 수 없다고 보고, 한국 병합을 앞두고 이 지역을 집중 공격했다.[1]

작전은 1909년 9월 1일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40일 계획이었으나 10월 말까지 늘어나 약 두 달 동안 이어졌다. 일본은 임시 파견대 2개 연대와 헌병·경찰을 투입하고, 바다에는 수뢰정을 배치해 섬으로 달아나는 길을 막았다.[2]

  • 1기 - 남원을 기점으로 고흥·광주·영광에 이르는 지대에 포위망을 치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훑어 내려갔다.
  • 2기 - 남은 의병을 전라남도 서남쪽 반도 끝으로 몰아넣었다.
  • 3기 - 서남 해안의 섬까지 뒤졌다.
  • 수색 방식 - 마을을 에워싸고 면장·동장에게 받은 남자 명부와 대조해 의심스러운 사람을 붙잡았다. 한 번 뒤진 마을을 불시에 다시 뒤지는 이른바 '교반적 방법'으로 숨은 의병까지 찾아냈다.
  • 폭도 도로 - 붙잡은 의병을 해남에서 광양·하동에 이르는 도로 공사에 강제로 동원했다. 일본은 이 길을 '폭도 도로'라 불렀다.
  • 피해 수치 - 『신편 한국사』는 의병장 103명과 의병 4,138명이 붙잡히거나 죽거나 자수했다고 쓴다.[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작전 전 기간 의병 측 사망 17,779명·부상 376명·포로 2,139명이라는 수치를 들어, 두 자료의 숫자가 크게 다르다.[1]
  • 의병장 - 심남일·안규홍·임창모·강무경 등이 이때 붙잡히거나 죽었고, 전해산은 12월에 붙잡혔다.
  • 결과 - 전라남도의 의병 활동은 1909년 말 사실상 끝났다. 근거지를 잃은 의병은 만주·연해주로 옮겨 독립군 기지 건설과 무장 투쟁을 준비했다. 일본은 이듬해 한국을 병합했다.

의병·독립군 탄압 사건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건 때 대상
남한 대토벌 작전 1909 호남 의병
경신참변 1920 간도의 한인 마을(청산리 전투 보복)
자유시 참변 1921 러시아 자유시의 독립군(러시아 적군 등의 무장 해제)
미쓰야 협정 1925 만주 독립군(중국 관헌과 일본의 단속 협정)
  1. ↑ 1.0 1.1 남한 대토벌 작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2.0 2.1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 『신편 한국사』 43,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