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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자령 전투(大甸子嶺 戰鬪, 1933)는 1933년 여름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이 중국 길림 구국군과 함께 만주 왕칭현의 대전자령(태평령) 고개에서 철수하던 일본군을 매복 공격해 크게 이기고 많은 군수 물자를 빼앗은 전투이다.

1931년 만주 사변 뒤 한국 독립당의 한국 독립군은 중국 항일군과 손잡고 한중 연합 작전을 펼쳤다. 1932년 쌍성보, 1933년 사도하자·동경성 전투에서 이긴 뒤, 한국 독립군과 시세영의 길림 구국군 부대는 대전자에 머물던 일본군 간도 파견대가 철수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연합군은 사흘 동안 약 100km를 행군해 대전자 북쪽 노모저하에 이르러, 공격의 중심을 한국 독립군이 맡기로 하고 고개 양쪽에 매복했다.[1][2]

일본군 행렬의 끝이 고개 중턱에 이르렀을 때 연합군이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고, 기습을 당한 일본군은 4시간의 격전 끝에 대부분 쓰러졌다. 연합군은 군복 3,000벌, 군수품 200여 마차, 대포 3문, 박격포 10문, 소총 1,500정 등을 빼앗았다. 군수품 노획으로는 독립 전쟁 사상 최대의 전과로 꼽힌다.

  • 날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6월 30일로, 국사편찬위원회의 『한민족독립운동사』는 7월 3일로 적는다.[3] 『신편 한국사』는 "6월 말에서 7월 초 사이"로 쓴다.
  • 병력 - 『신편 한국사』는 한국 독립군 500여 명이 시세영 부대 2,000여 명과 연합했다고 한다.
  • 전과 기록 - 노획 목록은 전투에 참가한 조경한의 기록에서 나온 것이어서, 『신편 한국사』는 과장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도 그대로 인정한다고 밝혔다.[2]

전리품을 나누는 과정에서 중국군과 갈등이 생겼고, 중국 공산당 세력이 커진 구국군과의 관계가 나빠지면서 연합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후 한국 독립군 주력은 1933년 말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요청에 따라 중국 관내로 옮겨 갔고, 지청천은 뒷날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만주 독립군의 승리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전투 때 부대
봉오동 전투 1920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등
청산리 전투 1920 북로 군정서(김좌진)·대한 독립군 등
쌍성보 전투 1932 한국 독립군 + 길림 자위군
대전자령 전투 1933 한국 독립군 + 길림 구국군
영릉가·흥경성 전투 1932~1933 조선 혁명군(양세봉) + 중국 의용군
  1. ↑ 대전자령 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2. ↑ 2.0 2.1 중국의용군과 연합항전, 『신편 한국사』 50,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18 확인.
  3. ↑ 한중연합군의 편성과 전투, 『한민족독립운동사』 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