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메뉴 여닫기
환경 설정 메뉴 여닫기
개인 메뉴 여닫기
로그인하지 않음
지금 편집한다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될 수 있습니다.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은 1940년 9월 중국 충칭에서 창설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군과 함께 대일 항전을 펼치고 미국 전략 정보국(OSS)과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다.

임시정부는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군대 창설을 계획했지만 일본군을 피해 여러 곳을 옮겨 다니느라 실행하지 못했다. 1940년 충칭에 자리 잡으면서 비로소 광복군 총사령부를 세웠다. 총사령은 지청천, 참모장은 이범석이었다. 처음에는 병력이 적어 중국 각지의 일본군 점령 지역에 사람을 보내 한인 청년을 모았고,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도병들도 합류했다.[1]

  • 9개 준승(1941) - 중국 군사 위원회는 원조의 대가로 '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을 요구해 광복군을 중국군 참모총장의 지휘 아래 두었다. 임시정부는 꾸준히 교섭해 1945년 이를 폐지하고 통수권을 되찾았다.
  • 대일 선전 포고(1941) - 일본의 진주만 공격 직후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다.
  • 조선 의용대 합류(1942) -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 의용대의 남은 대원이 들어와 제1지대가 되었고, 김원봉은 부사령관을 맡았다. 이로써 광복군의 세력이 커졌다.
  • 인도·미얀마 전선(1943) - 영국군의 요청으로 공작대를 보내 연합군과 함께 대적 선전, 일본군 문서 번역, 포로 심문 등을 맡았다.
  • OSS 특수 훈련과 국내 진공 작전(1945) - 미국 전략 정보국과 협약을 맺고 시안의 제2지대와 푸양의 제3지대 대원들이 특수 훈련을 받았다. 이들을 국내에 들여보내 주요 시설을 파괴·점령하는 국내 진공 작전을 세웠으나, 실행 직전 일본이 항복해 이루지 못했다. 국내 노동자에게 뿌려 군수 공장의 기계를 망가뜨리게 할 선전물도 이때 만들었다.
  • 광복 뒤 - 미군정이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아 대원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고, 일부는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참여했다.

무장 독립 부대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활동 부대
인도·미얀마 전선 활동, OSS와 국내 진공 작전 준비 한국광복군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1920) 북로 군정서(김좌진) 등
하와이에서 박용만의 주도로 창설 대조선 국민군단
흥경성·영릉가 전투 승리 조선 혁명군(양세봉)
쌍성보·대전자령 전투 승리 한국 독립군(지청천)
중국 관내에서 결성된 최초의 한인 무장 부대 조선 의용대(김원봉)
  1. ↑ 한국광복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