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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곡령(防穀令)은 개항 이후 일본으로 곡물이 지나치게 빠져나가자 지방관이 자기 관할 지역의 곡물 반출을 금지한 명령으로, 1889년 함경도와 황해도의 방곡령은 일본과의 외교 분쟁으로 번졌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 상인들은 쌀과 콩을 대량으로 사들여 일본으로 실어 갔다. 곡물 값이 오르고 흉년이 들면 농민과 도시 빈민의 식량이 모자랐다. 처음에는 곡물 유출을 막을 조약상 근거가 없었으나, 1883년 맺은 조일 통상 장정에 가뭄·홍수·병란 등으로 식량이 부족할 우려가 있으면 1개월 전에 일본 영사관에 알리고 방곡을 실시할 수 있다는 조항이 들어갔다.[1]

1889~1890년의 방곡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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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해도 - 1889년 황해도 관찰사 조병철이 일본 상인이 사들인 곡물의 반출을 막았다. 일본은 사전 통보가 없었다며 항의했고, 정부는 일본의 압력에 밀려 해제를 명했다. 1890년 관찰사 오준영이 다시 방곡령을 내렸으나 역시 해제되었다.
  • 함경도 - 1889년 10월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이 원산항을 통해 빠져나가는 콩의 유출을 1년간 금지했다. 일본은 통고가 늦었다는 점을 들어 해제와 조병식의 처벌을 요구했다. 조병식이 해제 명령을 따르지 않고 버티자 정부는 그를 감봉하고 강원도 관찰사로 옮겼다.

일본은 방곡령 때문에 일본 상인이 손해를 보았다며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했다. 수년의 교섭 끝에 1893년 조선 정부는 청의 중재로 11만 원을 배상하기로 합의했다. 방곡령 사건은 개항 이후 일본의 경제 침탈과 조선 정부의 약한 처지를 보여 준다. 곡물 유출로 인한 농민의 고통은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경제 침탈에 맞선 움직임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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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시기
함경도·황해도 관찰사가 곡물 반출을 금지 방곡령(1889)
시전 상인들이 외국 상인의 서울 침투에 맞서 상권 수호 운동 황국 중앙 총상회(1898)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맞서 회사를 세움 농광 회사(1904)
일본에 진 빚을 국민의 성금으로 갚자는 운동 국채 보상 운동(1907)
회사 설립에 총독의 허가를 받게 한 법령 회사령(1910)
  1. ↑ 방곡령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