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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 보상 운동(國債報償運動, 1907~1908)은 일본이 대한 제국에 떠안긴 차관 1,300만 원을 국민의 모금으로 갚아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고 국권을 지키려 한 경제적 구국 운동이다.

러일 전쟁 뒤 일본은 재정 고문 메가타를 앞세워 화폐 정리 사업과 시설 개선을 명목으로 차관을 잇달아 들여오게 했다. 1906년까지 들여온 차관은 1,150만 원에 이르렀고, 대한 제국의 재정은 일본에 완전히 묶였다. 1907년 2월 대구 광문사의 김광제·서상돈은 나랏빚 1,300만 원을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며, 2천만 국민이 석 달 동안 담배를 끊어(단연) 그 돈을 모으자는 취지서를 발표했다.[1]

  • 대구에서 시작 - 대구 광문사(대동광문회)가 단연회를 만들어 모금에 나섰다.
  • 서울과 전국으로 - 서울에서 국채 보상 기성회가 만들어졌고, 전국에 '국채 보상'이라는 이름을 단 단체가 20여 개 생겨났다.
  • 언론의 지원 - 대한매일신보가 취지서를 싣고 성금을 받는 등 운동을 앞장서 이끌었고, 『황성신문』·제국신문·『만세보』도 널리 알렸다.
  • 각계각층의 참여 - 고종도 담배를 끊겠다고 밝혔다. 상인·지식인·유생이 적극 참여했고, 여성들은 반지·비녀 같은 패물을 내놓았으며, 노동자·인력거꾼·기생·백정까지 의연금을 보냈다.

일본은 운동을 국권 회복 운동으로 보고 탄압했다. 통감부는 대한매일신보를 이끌던 영국인 베델을 재판에 넘겼고, 1908년 7월에는 양기탁이 국채 보상금을 가로챘다는 혐의를 꾸며 구속했다. 양기탁은 증거가 없어 무죄로 풀려났으나, 운동의 지도부가 분열하고 국민의 신뢰가 흔들리면서 운동은 끝내 멈추었다.

다른 경제·사회 운동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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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운동
대구에서 시작, 담배를 끊어 나랏빚을 갚자고 함 국채 보상 운동(1907)
관료와 상인이 대한 천일 은행을 세움(뒤에 황실이 운영) 광무개혁 시기 민족 금융 설립(1899)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가 '한 사람 1원씩' 모금 민립 대학 설립 운동(1920년대 초)
자작회·토산 애용 부인회 참여, '내 살림 내 것으로' 물산 장려 운동(1920년대)
백정에 대한 차별 철폐 형평 운동(1923~)
  1. ↑ 국채보상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