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파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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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파병(越南派兵, 1964~1973)은 박정희 정부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국의 요청에 따라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연인원 30만여 명의 국군을 남베트남에 보낸 일로, 그 대가로 받은 미국의 지원과 전쟁 특수는 경제 성장의 밑천이 되었다.

파병 구상은 1961년 11월 박정희 국가 재건 최고 회의 의장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처음 제안되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 커지자 동맹국의 참전을 바랐고, 한국 정부는 주한 미군 감축을 막고 경제 원조를 얻으려 했다. 1964년 9월 이동 외과 병원과 태권도 교관단 같은 비전투 부대를 시작으로, 1965년 10월에는 해병 제2여단(청룡 부대)과 육군 수도 사단(맹호 부대)이 전투 부대로는 처음 해외에 파병되었다. 이듬해 백마 부대가 더해졌다.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보낸 나라였다.[1]
미국은 1965년 말 추가 파병을 요청했고, 한국 정부는 그 대가를 문서로 약속받고자 했다. 1966년 3월 주한 미국 대사 윈스럽 브라운이 한국 정부에 건넨 통고문이 브라운 각서이다.[2] 문서에 적힌 날짜는 3월 4일이고, 해설에 따라서는 전달일을 3월 7일로 적기도 한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한국군 현대화를 위한 장비 제공과 추가 파병 비용 부담
- 최소 2개 사단이 베트남에 있는 동안 군사 원조 이관 중지
- 1억 5천만 달러 차관 외에 추가 경제 차관 제공, 수출 진흥을 위한 기술 원조
- 베트남에서 쓰는 물자와 용역을 한국에서 우선 조달
- 베트남 특수 - 군인과 기술자가 보낸 돈, 군수품 납품과 건설 공사로 외화가 크게 들어왔다. 물자 조달과 건설을 맡은 기업이 급성장해 재벌 순위가 바뀔 정도였고, 이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재원이 되었다.
- 희생 - 약 5,000명이 숨지고 1만 1,000여 명이 다쳤다. 전투 수당은 미군에 크게 못 미쳤고,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참전 군인이 많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 문제도 제기되었다.
- 철수 - 1969년 닉슨 독트린 이후 미국이 철수를 시작했고, 1973년 파리 평화 협정 체결 뒤 한국군도 3월까지 모두 돌아왔다.
- ↑ 베트남전쟁 1954~1975,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 ↑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과 미국의 한국 지원 약속-브라운 각서, 우리역사넷(사료로 본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