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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丙寅迫害)는 1866년(고종 3) 흥선 대원군이 천주교 금압령을 내려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수많은 조선인 신자를 처형한 사건으로, 병인사옥이라고도 하며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집권 초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에 비교적 너그러웠다. 러시아가 두만강 너머에서 통상을 요구하자, 천주교 신자인 전 승지 남종삼 등은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영국·프랑스와 손잡고 러시아를 막자고 건의했고, 대원군도 선교사를 만나려 했다. 그러나 베르뇌·다블뤼 주교와의 접촉이 늦어지고 뜻대로 되지 않은 데다, 천주교를 배척하는 여론이 높아지자 대원군은 1866년 초 금압령을 내려 대대적인 박해로 돌아섰다.[1]

  • 선교사 처형 - 조선에 있던 프랑스 선교사 12명 가운데 베르뇌 주교 등은 서울 노량 사장(새남터)에서, 다블뤼 주교 등 3명은 충청도 보령의 수영에서 처형되어 모두 9명이 죽었다.
  • 신자 처형 - 남종삼·홍봉주 등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고, 박해는 몇 해 동안 이어졌다. 천주교회 쪽 자료는 3년 동안 약 8,000명이 희생되었다고 본다. 『한국통사』에 나오는 더 큰 수치는 과장으로 여겨진다.
  • 절두산 - 서울 양화진 잠두봉에서도 많은 신자가 처형되어 뒤에 절두산이라 불렸다.

살아남은 리델·페롱·칼레 신부 가운데 리델이 청으로 빠져나가 톈진의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알렸다.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그해 강화도를 침략했다(병인양요).[2]

조선의 천주교 박해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건 때 내용
신해박해 1791년 정조 윤지충이 신주를 불사른 일(진산 사건)
신유박해 1801년 순조 이승훈·정약종 처형, 정약용 유배, 황사영 백서 사건
기해박해 1839년 헌종 프랑스 신부 3명 처형
병인박해 1866년 고종 프랑스 신부 9명 처형, 병인양요의 원인
  1. ↑ 천주교 탄압: 병인사옥, 『신편 한국사』 37,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8 확인.
  2. ↑ 병인양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