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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 전투(普天堡戰鬪)는 1937년 6월 4일 밤 동북 항일 연군의 한인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보의 일제 경찰 주재소와 관청을 습격한 국내 진입 작전이다.

1936년 동북 항일 연군은 남만주의 제1군·제2군을 묶어 제1로군을 만들고, 한인이 많던 부대를 제6사로 개편해 조선과 가까운 백두산 일대에서 활동하게 했다. 이 일대는 조국 광복회의 조직과 국내 진입 작전의 근거지가 되었다. 김일성이 이끈 제6사는 1937년 6월 4일 밤 보천보를 습격해 경찰 주재소·면사무소·우편국 등을 불태우고, 조국 광복회의 10대 강령과 포고문을 뿌린 뒤 물러났다. 이 일로 만주 한인 무장 부대의 활약이 국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1]

출처마다 다른 점

편집 원본 편집
  • 병력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북한 측 서술을 따라 150명이 습격조·차단조·정치공작조로 나뉘어 공격했다고 적고, 『신편 한국사』는 80여 명이라고 적는다.[2]
  • 지명 - 백과사전은 당시 행정 구역대로 갑산군 보천면으로, 『신편 한국사』는 혜산군으로 적는다. 지금은 북한의 양강도 보천군이다.
  • 평가 - 북한은 김일성 항일 무장 투쟁의 가장 큰 성과로 내세운다. 반면 백과사전은 보천보가 인구 1,300여 명의 작은 마을이고 무장 병력은 주재소 순사 5명뿐이었다며, 물자 보급 투쟁의 성격이 컸고 북한의 평가는 과장이라고 본다. 공격 부대를 이끈 사람이 북한의 김일성이 아닌 다른 김일성이었다는 설도 소개한다.

습격 때 뿌린 조국 광복회 10대 강령 전단과, 1937년 9~10월 혜산에 다시 잠입했다 붙잡힌 대원 3명을 실마리로 일제가 대대적인 수사에 나서, 1938년 9월까지 조국 광복회와 그 국내 조직 관계자 739명을 검거했다. 이로써 조국 광복회의 국내 조직은 사실상 무너졌다.[3]

  1. ↑ 보천보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2. ↑ (2) 동북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의 성립과 한인들의 활약, 『신편 한국사』 50권,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8 확인.
  3. ↑ 재만한인조국광복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