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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담의 난(毗曇의 亂, 647)은 신라 선덕 여왕 말년에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이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며 일으켰다가 김춘추·김유신 세력에게 진압된 반란이다.

비담의 반란군이 진을 친 경주 명활성의 성벽

비담은 645년(선덕 여왕 14) 11월 이찬으로서 귀족 회의의 우두머리인 상대등에 오른 인물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647년 정월 비담과 염종 등이 여자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며 군사를 일으켰으나 이기지 못했다고 짧게 적었다.[1] 643년 당 태종이 "여왕이라 이웃 나라가 업신여긴다"고 한 말이 귀족 사이에 파문을 일으킨 것이 배경으로 꼽힌다(→ 선덕 여왕).

  • 대치 - 반란군은 명활성에, 왕의 군대는 월성에 진을 치고 10일 넘게 공방을 벌였다.
  • 떨어진 별 - 한밤중 큰 별이 월성에 떨어지자 비담은 "여왕이 패할 징조"라며 군사를 부추겼다. 김유신은 허수아비에 불을 붙여 연에 실어 띄우고는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퍼뜨려 민심을 돌렸다. 이어 별이 떨어진 곳에 제사를 지내고 군사를 독려해 반란군을 깨뜨렸다.
  • 처벌 - 달아난 비담 등을 쫓아가 목을 베고 구족을 멸했다. 진덕왕 원년 기록은 정월 17일 비담 등 30명을 죽였다고 전한다.
  • 왕위 교체 - 반란이 진압되는 와중인 정월 8일 선덕 여왕이 세상을 떠났고, 사촌 동생 진덕 여왕이 뒤를 이었다.

난이 진압되면서 진골 귀족 세력이 물러나고 김춘추·김유신 세력이 실권을 잡아, 뒷날 태종 무열왕 계열 왕권의 바탕이 마련되었다.[2] 성격을 두고는 상대등이 왕위를 노린 운동이라는 견해, 국왕 세력에 대한 진골 귀족의 반발로 보는 견해, 선덕 여왕의 후계로 진덕 여왕이 정해진 데 대한 반발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선덕 여왕이 반란군에게 해를 입었는지,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지도 의견이 갈린다.[2]

신라의 반란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건 때 내용
비담의 난 선덕 여왕 16년(647) 상대등 비담·염종이 여왕을 문제 삼아 봉기, 김유신이 진압
김흠돌의 난 신문왕 원년(681) 왕의 장인 김흠돌의 모역, 진압 뒤 진골 숙청 (→ 신문왕)
김헌창의 난 헌덕왕 14년(822) 웅천주 도독이 아버지의 왕위 탈락에 반발, 장안국 선포 (→ 김헌창의 난)
  1. ↑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선덕왕 16년,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키다; 권41 열전1 김유신 상, 비담이 난을 일으키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2. ↑ 2.0 2.1 비담의 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