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량진 왜변
IT 위키
더 많은 작업
사량진 왜변(蛇梁鎭倭變, 1544)은 1544년(중종 39) 4월 왜선 20여 척이 경상도 사량진(지금의 경상남도 통영시 원량면)에 쳐들어와 사람과 말을 약탈한 사건이다.
삼포왜란과 달리 머물러 살던 일본인의 폭동이 아니라 왜구의 노략질이었고, 피해자도 10여 명에 그쳤다. 그러나 일본인의 왕래를 아예 끊자는 절왜론이 거세게 일어 조정은 임신약조를 깨고 일본인의 내왕을 막았다. 이후 무로마치 막부와 오우치·쇼니 씨 등 일부를 빼고는 교류가 끊겼다.[1]
막부와 쓰시마가 거듭 통교 재개를 청하자 조선은 1547년(명종 2) 정미약조를 맺어 교역을 다시 허락했다. 쓰시마 도주의 세견선을 25척으로 하고, 가덕도 서쪽에 닿는 배는 적선으로 보며, 규정을 어기면 2~3년 접대를 끊는 등 벌칙까지 두었다. 일본 배가 드나드는 포구는 부산포 한 곳으로 줄었다.[2][1]
이후에도 왜구의 침입은 끊이지 않아 1555년(명종 10) 왜선 70여 척이 전라도 달량포에 쳐들어온 을묘왜변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비변사가 상설 기구가 되었다.
| 사건 | 때 | 성격 | 뒤처리 |
|---|---|---|---|
| 삼포왜란 | 1510(중종 5) | 삼포 거주 일본인의 폭동 | 임신약조(제포만 개항) |
| 사량진 왜변 | 1544(중종 39) | 왜구의 사량진 약탈 | 통교 단절 뒤 정미약조(1547) |
| 을묘왜변 | 1555(명종 10) | 왜구의 전라도 달량포·영암 침입 | 비변사 상설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