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메뉴 여닫기
환경 설정 메뉴 여닫기
개인 메뉴 여닫기
로그인하지 않음
지금 편집한다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될 수 있습니다.

왜구(倭寇)는 13~16세기 한반도와 중국 해안을 노략질한 일본의 해적으로, 특히 14세기 후반 고려 말에 침입이 극심해 홍산·진포·황산 대첩과 쓰시마 정벌로 이어졌다.

왜구는 13세기에도 이따금 고려 해안에 나타났으나, 본격적인 침입은 1350년(충정왕 2)부터였다. 이 무렵 일본은 남북조의 내란으로 지방 통제가 무너졌고, 고려는 원 간섭기를 거치며 군사력이 약해져 있었다. 원·명 교체기의 긴장으로 북방에도 병력을 두어야 했기에 왜구에 힘을 모으기 어려웠다. 왜구는 동해·서해·남해 연안뿐 아니라 내륙 깊숙이까지 쳐들어와 조운선과 창고의 곡식을 빼앗고 사람을 잡아갔다. 개경 입구인 강화 교동과 예성강 어귀까지 나타나 천도 논의가 일 정도였고, 우왕 재위 14년 동안에만 378회 침입했다. 1370~1380년대가 가장 극심했다.[1]

고려 말의 왜구 격퇴

편집 원본 편집
  • 홍산 대첩(1376) - 최영이 홍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 화통도감 설치(1377) - 최무선의 건의로 화약과 화기를 만드는 임시 관청인 화통도감을 두었다. 최무선은 원 상인에게서 염초(화약 원료) 만드는 법을 익혀 화약 제조에 성공했다.[2]
  • 진포 대첩(1380) - 왜선 500여 척이 진포(금강 어귀)에 들어오자 나세·심덕부·최무선이 화포로 배를 모두 불태웠다. 화약 무기를 바다 싸움에 처음 쓴 사례로 꼽힌다.
  • 황산 대첩(1380) - 진포에서 배를 잃고 내륙으로 흩어진 왜구를 이성계가 지리산 부근 남원 황산에서 섬멸했다. 이 승리로 이성계는 신흥 무인 세력으로 이름을 높였다.
  • 관음포 대첩(1383) - 정지가 남해 관음포에서 화포를 써서 왜선을 격파했다.
  • 쓰시마 정벌(1389, 창왕 1) - 경상도 원수 박위가 병선 100여 척으로 왜구의 근거지 쓰시마를 쳐 적선 300여 척을 불태웠다.

이 밖에 수군을 늘리고 해안에 성과 초소를 쌓았으며, 투항한 왜인을 받아들이는 회유책도 썼다.

  • 쓰시마 정벌(1419, 세종 1) - 상왕 태종의 주도로 이종무가 쓰시마를 정벌했다. → 세종
  • 교린 정책 - 3포(부산포·제포·염포)를 열고 계해약조(1443)로 무역량을 제한해 왜인을 달랬다. → 왜관
  • 16세기에는 삼포왜란(1510)·을묘왜변(1555) 등 왜인의 소란이 이어졌고, 이를 계기로 비변사가 상설 기구로 자리 잡았다.

왜구 격퇴와 다른 대외 항쟁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실 상대
홍산·진포·황산 대첩, 박위의 쓰시마 정벌, 화통도감 왜구
서희의 외교 담판, 양규의 곽주 탈환, 강감찬의 귀주 대첩 거란 (→ 고려 거란 전쟁)
별무반 조직, 동북 9성 축조 여진 (→ 윤관)
강화 천도, 처인성·충주성·죽주성 전투, 삼별초 항쟁 몽골 (→ 고려 몽골 전쟁)
이방실 등의 격퇴 홍건적 (→ 공민왕)
  1. ↑ 왜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2. ↑ 화통도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