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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1258~1356)는 고려 고종 때 몽골이 화주(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에 두고 철령 이북 땅을 직접 다스린 관청으로, 1356년 공민왕이 무력으로 되찾았다.

13세기 후반 원이 차지한 고려의 영토

1258년(고종 45) 몽골군이 동북면에 쳐들어오자 용진현 사람 조휘와 정주 사람 탁청이 반란을 일으켜 동북면 병마사 신집평을 죽이고 화주 이북의 땅을 들어 몽골에 붙었다. 몽골은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두고 조휘를 총관, 탁청을 천호로 삼아 다스리게 했다.[1] 그 뒤 조휘의 집안(조양기·조소생)과 탁청의 집안(탁도경)이 총관과 천호를 대대로 물려받았다. 이 동안 고려 백성이 이곳으로 많이 옮겨 갔고, 고려는 여러 차례 관리를 보내 되돌려 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2]

  • 공민왕의 공격(1356) - 공민왕은 기철 등 부원 세력을 없애는 반원 개혁과 함께 유인우를 동북면 병마사로 보내 쌍성을 쳤다. 『고려사』 지리지는 7월에 추밀원부사 유인우가 쌍성을 깨뜨리고 화주·등주·정주·장주 등 여러 고을과 진을 되찾았다고 적었다.[1] 백과사전은 유인우의 직함을 밀직부사로 적는다.[2]
  • 이자춘의 내응 - 총관 조소생과 천호 탁도경이 맞섰으나, 조휘의 손자 조돈과 이 지역 토착 세력 이자춘이 고려군에 호응했다. 조소생 등은 이판령 너머로 달아났고 쌍성총관부는 없어졌다.
  • 이성계 집안의 성장 - 이자춘은 이 공으로 고려 조정에 들어섰고, 그 아들 이성계는 동북면을 기반으로 무장으로 성장했다.

1388년 명은 철령 이북 땅이 본래 원의 쌍성총관부 관할이었다며 그곳에 철령위를 두겠다고 알려 왔다. 고려는 이에 맞서 요동 정벌을 추진했고, 이것이 위화도 회군으로 이어졌다.

원이 고려 땅에 둔 기구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기구 설치 자리 결과
쌍성총관부 1258 화주(영흥), 철령 이북 1356년 공민왕이 무력으로 되찾음
동녕부 1270 서경(평양), 자비령 이북 1290년 돌려받음 (→ 동녕부)
탐라총관부 1273 제주도 삼별초 진압 뒤 설치, 1294년 돌려받음
정동행성 1280 개경 일본 원정 기구에서 내정 간섭 기구로 (→ 원 간섭기)
  1. ↑ 1.0 1.1 『고려사』 권58 지리지 동계 화주, 화주 연혁,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
  2. ↑ 2.0 2.1 쌍성총관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