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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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의 난(王子의 亂)은 조선 태조 때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태조의 아들들 사이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정변으로, 1398년 제1차 난에서 이방원이 정도전과 세자 방석을 없애고, 1400년 제2차 난에서 형 방간을 꺾은 뒤 왕위에 올랐다(태종).
태조 이성계에게는 첫 부인 신의왕후 한씨가 낳은 여섯 아들과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가 낳은 두 아들이 있었다. 조선을 세우는 데 공이 가장 큰 아들은 한씨 소생의 다섯째 이방원이었다. 그런데 1392년 세자를 정할 때 공신 배극렴·조준·정도전 등은 나이와 공을 따져 정하자고 했으나, 태조는 강씨를 아껴 그 소생 가운데서 고르려 했고, 결국 막내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 방원은 개국 공신 책봉에서도 빠졌다.[1]
- 배경 - 세자를 가르치는 일을 맡은 정도전은 재상 중심의 정치를 내세우고 요동 정벌을 준비하며 진법 훈련을 강화해, 왕자와 공신들이 거느린 사병을 없애려 했다. 사병을 잃게 된 방원과 정도전의 대립이 극에 달했다.
- 경과 - 1398년(태조 7) 8월, 태조가 병으로 누운 틈에 방원은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이 한씨 소생 왕자들을 해치려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숙번 등의 사병을 움직였다.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을 죽이고, 세자 방석을 폐해 귀양 보내는 길에 죽였으며 그 형 방번도 죽였다. 무인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라고도 한다.[2]
- 결과 - 방원은 세자 자리를 사양하고 둘째 형 방과를 세자로 세웠다. 같은 날 내린 교지는 정도전 일당이 방석을 끼고 방과 등을 해치려 했다고 적었다. 태조는 9월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니 그가 정종이다. 실권은 방원과 그를 도운 하륜·이거이 등이 쥐었다.
한씨 소생의 넷째 방간도 왕위에 뜻이 있었다. 1차 난의 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불만을 품은 박포가 방원이 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부추기자, 1400년(정종 2) 방간이 사병을 일으켜 개경 시내에서 방원과 싸웠다. 방원이 이겨 방간은 귀양 가고 박포는 처형되었다. 방간의 난 또는 박포의 난이라고도 한다. 그해 2월 방원은 왕세제가 되었고 11월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3]
두 차례의 난으로 재상 중심의 정치를 내세운 세력이 무너지고 왕권 중심의 체제로 바뀌었다. 방원은 즉위 전후로 사병을 없애 군권을 모으고, 도평의사사를 고쳐 의정부를 두었으며, 승정원을 따로 두어 왕명 출납을 맡겼다. 이것이 태종 때 6조 직계제·호패법으로 이어지는 왕권 강화의 바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