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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仁祖反正)은 1623년(광해군 15) 3월 이귀·김류 등 서인 세력이 광해군과 집권 대북파를 몰아내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을 왕(인조)으로 세운 정변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뒤 나라를 다시 세우는 데 힘썼으나, 왕위를 지키려고 이복동생 영창 대군과 형 임해군을 죽이고, 영창 대군의 어머니인 인목 대비를 서궁(경운궁)에 가두어 대비의 칭호를 빼앗았다. 서인은 이를 폐모살제(어머니를 폐하고 아우를 죽임)라 부르며 강상의 도리를 어긴 일로 몰았다. 또 명이 임진왜란 때 도와준 은혜를 저버리고 후금과 가까이한다는 점도 비판했다.[1]

  • 모의 - 이귀가 신경진·심기원·김자점 등과 손잡고, 신망 높던 김류를 대장으로 삼아 능양군을 세우기로 했다. 1622년 평산 부사였던 이귀가 호랑이 사냥을 핑계로 군사를 움직이려 했으나 계획이 새어 나가 미루었다.
  • 거사 - 1623년 3월 13일 밤 반정군 600~700명이 홍제원에 모였고, 능양군은 친병을 이끌고 연서역에서 장단 부사 이서의 군사 700여 명과 합류했다. 이들은 창의문을 넘어 창덕궁으로 들어갔고, 광해군은 궁을 빠져나가 숨었다가 붙잡혔다.
  • 즉위 - 능양군이 옥새를 경운궁의 인목 대비에게 바치자 대비가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을 즉위시켰다. 『인조실록』은 즉위를 3월 13일(계묘) 기사로 실었다.[2]
  • 광해군은 강화도로 쫓겨났다가 뒤에 제주도로 옮겨져 그곳에서 죽었다. 이이첨·정인홍 등 대북파 수십 명이 처형되고 200여 명이 귀양 갔다.
  • 반정에 공을 세운 이귀·김류 등 33명이 정사공신이 되었다. 논공이 고르지 못하다는 불만이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이어졌다.
  • 서인이 정권을 잡고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불러 남인과 함께 정국을 이끌었다.
  • 반정 세력은 명을 가까이하고 후금을 멀리하는 정책을 폈고, 이는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의 배경이 되었다.[1]

조선의 정변·환국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건 때 내용
왕자의 난 1398·1400 이방원이 정도전·방석, 이어 방간을 제거
계유정난 1453 수양 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권력 장악
중종반정 1506 연산군 폐위, 중종 옹립
인조반정 1623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서인이 광해군 폐위
경신환국 1680 허적·윤휴 등 남인이 대거 쫓겨남 (→ 환국)
  1. ↑ 1.0 1.1 인조반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3일, 의병을 일으켜 즉위하다,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