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메뉴 여닫기
환경 설정 메뉴 여닫기
개인 메뉴 여닫기
로그인하지 않음
지금 편집한다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될 수 있습니다.

을축년 대홍수(乙丑年大洪水)는 1925년(을축년) 7~9월 네 차례 집중 호우로 한강·임진강·대동강·낙동강 등이 범람한 대홍수로, 특히 7월 한강 범람으로 경성(서울)과 그 주변이 큰 피해를 입었다.

1925년 7월 18일 홍수 때 용산·마포 일대 범람 지역을 표시한 「경성부수재도」(서울역사박물관)

1925년 여름 한반도에는 네 차례 큰물이 났다. 가장 큰 피해를 낸 것은 7월 중순의 2차 홍수였다. 7월 14일 대만 부근에서 생긴 열대 저기압이 황해를 지나며 16~18일 한강·임진강 유역에 집중 호우를 내렸고, 18일 한강 수위는 뚝섬 13.59m, 한강 인도교 11.66m, 구용산 12.74m로 관측 이래 가장 높았다. 동부 이촌동·뚝섬·송파·잠실리·신천리·풍납리 등이 물에 잠겼고, 용산역의 열차도 잠겼다. 8월에는 관서 지방(대동강·청천강·압록강), 9월 초에는 남부 지방(낙동강·영산강·섬진강)이 범람했다.[1]

  • 인명 - 한강에서만 집계된 익사자가 404명이었다. 경기도 이재민은 7월 25일까지 4만 1천여 명으로 발표되었다.
  • 가옥·농지 - 한강 유역 범람 면적이 586㎢, 가옥 피해가 약 3만 동(유실 5천, 붕괴 7천, 침수 1만 8천)에 이르렀다.
  • 재산 - 전국 피해액은 약 1억 322만 원으로, 조선 총독부 특별 회계 1925년 예산의 59.5%에 해당했다.[2]
  • 문화유산 - 서울 풍납동 토성의 서쪽 벽이 쓸려 나가면서 백제 유물이 드러나 이 토성이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 조선 총독부는 용산 제방을 높이는 한편 홍수가 잦은 이촌동에 사람이 살지 못하게 했다. 동부·중부 이촌동 조선인 주민은 노량진으로 옮겨 가야 했다.
  • 1926년부터 1937년까지 한강 제방 공사를 벌였으나, 일본인 거주지와 철도·군사 시설 보호에 무게가 실렸다는 비판을 받는다.
  • 조선인 청년 단체의 구제 활동과 수재 강연회는 금지되었고, 총독부의 소극적인 구제는 조선인의 비판을 샀다.[2]
  • 뒷날 한강 방수 시설을 세울 때 을축년 홍수가 기준이 되었고, 도시 계획에서 치수가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2025년 서울역사박물관은 100주년 기획전 「미증유의 대홍수: 1925 을축년」을 열었다.[3]

다른 시대의 재난·환경 이야기와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실 시대
원에 바칠 매를 기르는 응방 고려 (→ 응방)
소빙기 냉해로 100만 명 안팎이 죽은 대기근 조선 현종 (→ 경신 대기근)
한강 범람, 이촌동 주민 이주 1925년 일제 강점기
방조제를 막아 만든 시화호의 수질 오염과 갯벌 파괴 1990년대 대한민국
  1. ↑ 을축년 홍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2.0 2.1 을축년대홍수 1925,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3. ↑ 미증유의 대홍수: 1925 을축년, 서울역사박물관,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