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방
IT 위키
더 많은 작업
응방(鷹坊)은 고려 원 간섭기에 원에 바칠 매를 잡아 기르고 왕의 매사냥을 맡도록 둔 관청으로, 특권을 누리며 백성을 괴롭혀 여러 차례 없앴다가 다시 두었으며 조선에서도 이어지다가 1715년(숙종 41)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 특권 - 응방은 세금과 부역을 면제받고 왕에게서 땅(사전)을 받았으며 노비와 소작인을 거느렸다. 죄를 짓거나 부역을 피해 도망한 사람을 모아 이리간이라는 마을을 이루게 하고 응방에 딸리게 했다.
- 민폐 - 매를 먹이려고 성안의 닭과 개를 마구 잡아갔고, 응방 관리들은 왕의 위세를 믿고 주민을 괴롭혔다. 충렬왕은 1277년 응방 소속 민호를 205호에서 102호로 줄이고 관리를 보내 단속하게 했으나 효과가 적었다.[3]
- 치폐 반복 - 1288년과 1309년(충선왕 1)에 없앴다가 다시 두었고, 충목왕 때 없애면서 응방이 차지한 땅과 노비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공민왕 때 다시 두었는데, 『고려사』 백관지는 1371년(공민왕 2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372년(공민왕 21)으로 적는다. 창왕 때 완전히 없앴다.[2]
응방은 궁궐 안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설치되었고, 특히 해동청이 나는 함경도 지방을 중시했다.[1] 원에 바칠 매를 얻으려고 매의 산지에서 매를 잡아들이고, 매를 먹이려고 마을의 닭과 개까지 거두어 갔다. 사람과 동물, 자연 환경의 관계라는 눈으로 고려 후기를 볼 때 자주 드는 사례이다.
조선도 1395년(태조 4) 응방을 두었다. 연산군 때는 좌·우응방에 군사 수백 명을 배치해 매를 잡게 하는 등 민폐가 컸다. 1517년(중종 12) 남쪽 지방의 응방을 없앴고, 1715년(숙종 41) 완전히 폐지되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