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의 생활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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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의 생활 문화는 1910~1945년 식민 지배 아래 경성 등 도시를 중심으로 백화점·영화관·라디오 같은 근대 소비·대중문화가 퍼지고 의식주가 바뀐 모습을 이른다.

1920년대 이후 도시 인구가 늘고 전차·전기·상하수도 같은 근대 시설이 갖추어지면서 도시민의 일상이 크게 달라졌다. 새로운 상품과 광고, 영화와 유행가가 신문·잡지를 타고 퍼졌고, 서양식 옷차림과 생활 방식을 따르는 젊은이가 늘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일본인이 많이 사는 경성 남촌(본정·명치정 일대)과 일부 상류층에 몰렸고, 도시 변두리에는 토막민 같은 빈민이 늘어 식민지 근대의 불균형을 드러냈다. 1937년 중일 전쟁 뒤에는 전시 통제로 소비 생활이 크게 위축되었다.
- 백화점 - 1930년을 전후해 일본 자본의 미쓰코시(三越)·조지야(丁字屋)·미나카이(三中井)·히라타 백화점이 경성에 들어섰다. 1930년 문을 연 미쓰코시 경성점 신관은 지하 1층·지상 4층에 옥상 정원과 전망대를 갖추어 쇼핑과 구경을 함께 즐기는 공간이 되었다(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본점 건물). 한국인 자본으로는 1931년 박흥식이 세운 화신 백화점이 유일했다.[1]
- 광고 - 신문과 잡지에 약품·화장품·조미료·술 광고가 넘쳐나며 새로운 소비 욕구를 부추겼다.
- 다방과 카페 - 1920년대 후반부터 경성에 다방과 카페가 생겨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모였다.
- 옷차림 - 남성의 양복과 단발, 여성의 짧은 통치마와 구두가 퍼졌다. 1920~1930년대 서양식 차림과 유행을 좇는 젊은이를 모던 보이, 모던 걸이라 불렀는데, 겉멋만 좇는다는 비아냥도 함께 받았다. 잡지 『별건곤』 같은 대중 잡지에는 이들의 차림새를 풍자한 삽화가 실렸다. 전시 체제기에는 남성에게 국민복, 여성에게 몸뻬를 입도록 강요했다.
- 음식 - 일본에서 만든 화학조미료(아지노모토)가 1910년대부터 팔리기 시작해 신문 광고를 통해 가정과 음식점에 퍼졌다. 빵·커피·과자 같은 서양 음식도 도시에서 소비되었다.
- 주거 - 1920~1930년대 서양식 응접실과 침실을 둔 문화 주택이 교외에 지어져 중산층의 선망을 받았다. 한편 서울 북촌 등지에는 대청에 유리문을 달고 마당을 좁힌 도시형 한옥이 대량으로 지어졌다. 집을 잃은 빈민은 도시 변두리에 움집 같은 토막을 짓고 살았다.
- 영화 - 1919년 단성사에서 연쇄극 「의리적 구토」가 상영되었고,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개봉해 큰 인기를 끌었다. 1932년 이규환이 각본·감독을 맡고 나운규가 주연한 「임자 없는 나룻배」는 철교 공사로 일터를 잃는 뱃사공의 비극으로 식민지 민중의 처지를 그렸다. 1935년에는 첫 발성 영화 「춘향전」이 나왔다. 중일 전쟁 뒤에는 조선 영화령(1940)으로 영화 제작이 통제되었고, 지원병·징병을 홍보하는 친일 선전 영화가 만들어졌다. 1944년 방한준이 연출한 「병정님」은 지원병 훈련소의 생활을 보여 주며 조선인 징병제를 미화했다.[2]
- 라디오 - 1927년 경성 방송국(호출 부호 JODK)이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다. 모든 방송은 조선 총독부 체신국의 사전 검열을 거쳐 송출되었고, 중일 전쟁 뒤에는 전쟁 선전과 동원의 도구로 쓰였다. 처음에는 한국어와 일본어를 섞어 내보내다가 1930년대 초 조선어 방송을 따로 하는 이중 방송을 실시했다.[3]
- 유행가와 음반 - 1926년 윤심덕의 「사의 찬미」 음반이 크게 팔린 뒤 축음기와 유행가가 퍼졌다. 1930년대에는 이애리수의 「황성 옛터」, 고복수의 「타향」,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같은 트로트와 신민요가 인기를 끌었다(→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
- 연극 - 토월회 등의 신극 운동과 신파극이 공연되었다.
- 스포츠 - 1929년 경성과 평양의 축구 대표 팀이 맞붙는 경평 축구 대회가 시작되어 많은 관중을 모았다. 신문사들이 주최한 각종 경기 대회가 열리며 스포츠가 대중의 오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