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괄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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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李适의 亂, 1624)은 조선 인조 때 인조반정의 공신 이괄이 반역 혐의를 받게 되자 평안도에서 군사를 일으켜 한양을 점령한 반란으로, 인조가 공주로 피란했으나 길마재 전투에서 관군에 패해 진압되었다.
이괄은 1623년 서인이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에 참여해 큰 공을 세웠으나 2등 공신에 그쳤다. 이어 후금의 침입에 대비해 평안 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영변에서 1만여 명의 정예병을 거느렸다. 1624년 1월 반정 공신들의 의심 속에 이괄과 아들 이전이 역모를 꾀한다는 고변이 들어왔고, 조사 끝에 무고로 드러났으나 조정은 아들을 잡아 올리려 했다. 이괄은 자신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보고 조정에서 보낸 사람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1]
- 거병 - 1624년(인조 2) 1월 영변에서 일어나 서울로 압송되던 구성 부사 한명련을 구해 함께 군을 이끌었다. 관군의 주력을 피해 샛길로 남하했다.
- 황주·마탄 전투 - 황주 신교와 예성강 상류의 마탄에서 관군을 크게 무찔렀다.
- 인조의 공주 피란 - 반란군이 임진강을 넘자 인조와 대신들은 서울을 버리고 공주로 피란했다.
- 한양 점령 - 2월 11일 반란군이 서울에 들어와 경복궁 옛터에 머물렀다.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군이 도성을 점령한 첫 사례였다. 이괄은 선조의 아들 흥안군을 왕으로 세웠다.
- 진압 - 도원수 장만과 정충신 등이 이끄는 관군이 서울 서북쪽 길마재(안현)에 진을 쳐 반란군을 크게 이겼다. 이괄과 한명련은 광주를 거쳐 이천으로 달아났다가 부하에게 죽임을 당했다. 인조는 2월 22일 서울로 돌아왔다.
- 장만·정충신·남이흥 등 32명이 진무공신에 책봉되었다.
- 반란군의 정예병이 무너져 북방 방어가 약해졌다.
- 한명련의 아들 한윤 등 잔당이 후금으로 달아나 조선 사정을 알리고 광해군 폐위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침략을 부추겼다. 이는 1627년 정묘호란의 한 원인이 되었다.
- 이후 조정은 반란을 경계해 수도 방어를 강화했고, 총융청·수어청 설치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