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술 농민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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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술 농민 봉기(壬戌農民蜂起, 1862)는 조선 철종 13년 임술년에 삼정의 문란과 지방관의 수탈에 맞서 경상도 단성·진주에서 시작해 전국 70여 고을로 번진 농민 항쟁으로, 임술 민란 또는 진주 민란(진주 농민 봉기)이라고도 한다.
19세기 세도 정치 아래 토지세(전정)·군포(군정)·환곡(환정)의 삼정이 크게 문란해졌다. 토지세에는 온갖 부가세가 붙었고, 고을에 따라 세금을 토지에 한데 몰아 거두는 도결이 시행되어 수령·향리가 중간에서 이익을 챙겼다. 환곡은 빌려주는 제도가 아니라 사실상의 세금이 되었고, 향리가 빼돌린 환곡(포흠)을 농민에게 다시 떠넘겼다.[1]
- 원인 - 경상 우병사 백낙신이 부정하게 거둔 재물과, 진주목과 병영이 빼돌린 환곡을 토지에 덧붙여 농민에게 물리려 했다.
- 주도 - 몰락 양반 유계춘 등이 1~2월 여러 차례 모임을 열어 대책을 의논하고, 초군(땔나무꾼)과 농민을 모았다.
- 봉기 - 1862년 2월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른 농민들이 진주 읍내로 들어가 관아를 공격하고 악명 높은 향리를 죽였으며, 부호의 집을 불태웠다. 백낙신을 붙잡아 죄를 따졌다.
- 수습 - 조정은 박규수를 안핵사로 보내 사건을 조사하게 했다. 박규수는 백낙신 등 관리를 처벌하는 한편 유계춘 등 주동자를 처형했고, 원인이 삼정의 문란에 있다고 보고했다.
- 2월 단성에서 먼저 일어난 항쟁은 진주로 이어졌고, 3월에는 경상도 전역, 4월에는 전라도, 5월에는 충청도로 번졌다. 함경도·경기·황해도·제주까지 모두 70여 고을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 대부분 고을 단위의 봉기였고, 서로 연대하지는 못했다.
| 사실 | 사건 |
|---|---|
| 백낙신의 수탈, 유계춘 주도, 박규수를 안핵사로 파견, 삼정이정청 설치 | 임술 농민 봉기(1862) |
| 서북인 차별에 반발, 홍경래·우군칙 주도, 정주성 농성 | 홍경래의 난(1811) |
| 반정 공신이 일으켜 왕이 공주로 피란 | 이괄의 난(1624) |
| 고부 군수 조병갑의 수탈, 전주 화약 뒤 집강소 설치 | 동학 농민 운동(1894) |
| 공주 명학소의 망이·망소이 봉기 | 무신 집권기의 민란(고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