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장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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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장 사건(爭長事件)은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 당에서 신라와 발해가 사신의 자리 순서와 빈공과 급제 서열을 두고 서로 윗자리를 다툰 외교 분쟁이다.
당은 여러 나라 사신이 조회할 때 자리 순서를 정해 두었는데, 발해 사신의 자리는 신라 사신 아래였다. 남북국 시대의 두 나라는 서로 경쟁하면서도 당에서 누가 앞서는지를 나라의 위신으로 여겼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다툼을 일반적으로 신라와 발해의 '쟁장 사건'이라 부른다고 설명한다.[1]
- 897년 자리다툼 - 발해 왕자 대봉예가 새해를 축하하는 하정사로 당에 가서, 발해가 크고 군사가 강하다며 발해 사신을 신라 사신 위에 앉게 해 달라고 청했다. 당은 "나라의 순서는 강약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옛 관례에 따른다"며 거절했다.[1] 이 소식을 들은 신라는 감사의 뜻을 담은 표문을 올렸는데, 최치원이 신라 왕을 대신해 지은 「사불허북국거상표」(북국이 윗자리에 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데 감사하는 표)이다. 표문에서 신라는 발해를 '북국'이라 불렀다.
- 906년 무렵 급제 서열 다툼 - 신라의 최언위(뒤의 고려 학자)와 발해 재상 오소도의 아들 오광찬이 같은 해 당의 빈공과에 급제했는데, 최언위의 이름이 앞에 놓였다. 오소도는 자신이 급제할 때는 신라의 이동보다 앞에 이름이 올랐다며 아들의 이름을 최언위 위로 올려 달라고 청했으나, 당은 최언위의 재주가 뛰어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2]
신라와 발해가 서로를 같은 민족의 나라로 여기기보다 경쟁 상대로 보았음을 보여 준다. 동시에 발해가 국력을 바탕으로 국제 사회에서 신라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대우를 받으려 했음을 알려 준다. 오소도가 이전에 신라 사람보다 앞서 급제한 일이 있었던 것처럼 빈공과에서는 두 나라 유학생이 서열을 다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