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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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공과(賓貢科)는 당을 비롯한 중국 왕조가 외국인을 따로 뽑으려고 치른 과거로, 신라 하대에는 신분의 벽에 막힌 6두품 출신 유학생이 많이 응시해 급제했다.
당은 주변 나라에서 온 유학생에게 문을 열어 국자감에서 공부하게 하고, 외국인만을 위한 과거를 따로 두었다. 신라는 처음에 왕실 자제를 숙위 학생으로 보냈으나, 9세기에는 스스로 비용을 대고 건너가는 유학생이 늘면서 빈공과 급제자가 잇따라 나왔다. 821년(헌덕왕 13) 김운경이 신라인으로는 처음 급제했고, 이후 당이 망할 때까지 신라인 수십 명이 급제했다. 발해 사람도 응시했다.[1]
- 배경 - 골품제 아래에서 6두품은 아찬 이상으로 오를 수 없었다. 학문이 뛰어나도 중앙 요직에 오르기 어려워 당에 건너가 길을 찾았다.
- 대표 인물 - 최치원은 12살에 당에 건너가 874년 빈공과에 급제했고, 황소의 난 때 「토황소격문」을 지어 이름을 떨쳤다. 최승우·최언위도 빈공과 출신이다. 이 세 사람을 흔히 '신라 말 3최'라 부른다.
- 귀국 뒤 - 돌아온 이들은 골품제의 한계를 비판하고 개혁을 건의했다. 최치원은 진성 여왕에게 시무 10여 조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은거했다. 최승우는 견훤의 후백제에, 최언위는 고려에 들어가 새 왕조의 문한을 맡았다.
- 발해와의 경쟁 - 872년 빈공과에서 발해의 오소도가 신라의 이동보다 높은 순위로 급제하자 신라가 불쾌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발해도 많은 유학생을 당에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