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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渤海, 698~926)는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말갈인과 함께 동모산에서 세운 나라로, 만주와 한반도 북부, 연해주에 걸친 넓은 땅을 다스리며 남쪽의 통일 신라와 함께 남북국을 이루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은 고구려 유민을 요서의 영주 일대로 옮겼다. 696년 거란인 이진충의 반란으로 영주가 혼란에 빠지자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이끌고 동쪽으로 옮겨 698년 동모산(지금의 지린성 둔화 부근)에서 나라를 세웠다. 처음 이름은 진(震)이었고, 713년 당에게 발해군왕으로 책봉된 뒤 발해를 나라 이름으로 썼다. 지배층은 고구려계가 중심이었고 주민 다수는 말갈인이었다.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 '고려 국왕'이라 칭하고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았다고 밝혀 고구려 계승 의식을 드러냈다.[1]

주요 왕과 발전

편집 원본 편집
  • 고왕 대조영 - 698년 건국. 돌궐과 통교하고 신라에 사신을 보내 대아찬 벼슬을 받았다. 건국에 앞서 당이 보낸 이해고의 군대를 천문령에서 크게 물리쳤고(천문령 전투), 추격을 떨친 뒤 동쪽으로 옮겨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웠다.[1]
  • 무왕 대무예 - 연호 인안(仁安). 동북방의 말갈을 정복해 영토를 넓혔다. 흑수말갈 문제로 당과 대립해 732년 장문휴를 보내 수군으로 당의 등주(산둥반도)를 공격했다. 당과 신라를 견제하려고 일본과 국교를 맺었다.
  • 문왕 대흠무 - 연호 대흥(大興)·보력. 당과 친선하며 3성 6부의 통치 체제를 갖추고 주자감을 두었다. 신라와 오가는 상설 교통로 신라도를 열었다.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756년 무렵), 다시 동경으로 옮겼다. 762년 당이 발해 국왕으로 격을 높였고, 왕을 '황상'이라 부르는 등 황제국 체제를 갖추었다.
  • 선왕 대인수 - 연호 건흥(建興). 대부분의 말갈을 복속하고 요동까지 진출해 최대 영토를 이루었다. 지방 제도를 5경 15부 62주로 정비했다. 이 무렵 당이 발해를 해동성국(바다 동쪽의 번성한 나라)이라 불렀다.
  • 신라와의 자리다툼 - 897년 당에 간 발해 왕자 대봉예가 발해 사신을 신라 사신보다 윗자리에 앉혀 달라고 청했으나 당이 옛 관례를 들어 거절했다. 10세기 초에는 빈공과 급제 서열을 두고도 다투었다(→ 쟁장 사건).
  • 멸망 - 925년 말 거란(요)의 야율아보기가 쳐들어와 926년 정월 수도 상경 용천부가 함락되었다. 유민 상당수가 고려로 왔고, 고려 태조는 발해 세자 대광현을 받아들였다.
  • 독자 연호 - 인안·대흥·건흥 등 독자적인 연호를 써서 당과 대등한 나라임을 드러냈다(→ 한국의 연호).
  • 황후 묘지 - 2000년대 허룽 룽하이 고분군에서 문왕의 왕비 효의황후와 제9대 간왕의 왕비 순목황후의 묘지가 나왔다. 묘지에는 보력·건흥 같은 발해 연호가 쓰였고 왕비를 황후라고 불러, 왕을 황상이라 부른 정혜·정효 공주 묘지와 함께 발해가 안으로 황제국 체제를 갖추었음을 보여 준다.[1]
  • 3성 6부 - 당의 제도를 받아들였으나 이름과 운영은 달랐다. 3성은 정당성·선조성·중대성이고, 정당성의 장관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했다. 6부는 충·인·의·지·예·신이라는 유교 덕목을 이름으로 삼았고, 좌사정·우사정이 나누어 맡는 이원적 구조였다.
  • 중정대 - 관리의 비리를 감찰했다. 문적원은 서적 관리, 주자감은 귀족 자제에게 유학을 가르치는 최고 교육 기관이었다.
  • 5경 15부 62주 - 『신당서』에 따르면 숙신의 옛 땅에 상경 용천부, 그 남쪽에 중경 현덕부, 예맥의 옛 땅에 동경 용원부, 옥저의 옛 땅에 남경 남해부, 고구려의 옛 땅에 서경 압록부를 두었다. 지방 말단의 촌락은 말갈인 수령이 다스렸다.
  • 군사 - 중앙군 10위를 두어 궁궐과 수도를 지켰다.
  • 경제 - 밭농사가 중심이었고 목축과 수렵이 활발했다. 솔빈부의 말이 이름난 특산물로 당에 수출되었다. 담비 가죽·인삼 등도 유명했다. 당의 산둥반도 덩저우에는 발해 사신과 상인을 위한 발해관이 있었다. 주변 나라와는 영주도·조공도(당), 거란도(거란), 신라도(신라), 일본도(일본) 같은 교통로로 오갔다.
  • 불교 - 왕실과 귀족이 불교를 숭상했다. 동경 지역에서 나온 이불병좌상은 고구려 불상의 양식을 이었다. 벽돌로 쌓은 영광탑은 거의 온전하게 남은 발해의 탑이다. 상경성 절터에 남은 석등은 현무암을 다듬어 6m 남짓 높이로 쌓은 것으로, 받침의 연꽃무늬가 고구려 양식을 이었다.
  • 고구려 문화 계승 - 상경성 등에서 나온 온돌, 굴식 돌방무덤과 모줄임천장 구조의 정혜 공주 묘, 연꽃무늬 수막새 등은 고구려 양식을 이었다.
  • 당 문화의 영향 - 상경성은 당의 장안성을 본떠 주작대로를 냈다. 벽돌무덤인 정효 공주 묘와 그 묘지석의 4·6 변려체 문장도 당의 영향을 보여 준다.

다른 나라와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실 나라
인안·대흥 등 독자 연호, 정당성·중정대, 주자감 발해
골품에 따라 관직 승진을 제한함 신라 (→ 골품제)
정사암에서 재상을 뽑고 중대사를 결정함 백제 (→ 삼국의 귀족 회의)
진대법으로 빈민을 구제함 고구려 (→ 진대법)
기인 제도로 지방 세력을 견제함 고려 (→ 기인 제도)
9주 5소경, 국학을 둠 통일 신라 (→ 국학 (신라))
  1. ↑ 1.0 1.1 1.2 발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