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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총의 난(趙位寵의 亂, 1174~1176)은 고려 명종 4년 서경 유수 조위총이 의종을 죽인 정중부·이의방 등 무신 집권자를 치겠다며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켜, 절령 이북 40여 성의 호응을 얻었으나 1176년 진압된 반란이다.

평양(서경)의 대동문. 지금 문은 1635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1170년 무신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1173년 김보당이 의종을 다시 세우려고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뒤 의종을 죽였다. 의종 말에 병부상서로서 서경 유수가 되었던 조위총은 이듬해인 1174년, 개경의 중방이 북계 여러 성을 토벌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동계·북계의 여러 성에 격문을 돌려 군사를 모았다. 절령(자비령) 이북의 40여 성이 이에 호응했다.[1]

  • 절령 싸움(1174) - 조정은 평장사 윤인첨에게 3군을 주어 치게 했으나, 정부군은 절령역에서 폭풍과 폭설 속에 반란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졌다. 반란군은 개경 서쪽까지 밀고 내려왔다.
  • 이의방의 반격 - 이의방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물리치고 대동강까지 쫓아갔으나, 추위 때문에 서경을 함락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해 말 이의방은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보낸 승려 종참에게 살해되었다.
  • 금에 원병 요청 - 서경이 포위되어 식량이 바닥나자, 조위총은 금에 사신을 보내 절령 서쪽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40여 성을 바칠 테니 군사를 보내 달라고 청했다. 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사신을 잡아 고려로 돌려보냈다.
  • 서경 함락(1176) - 1년 넘게 포위한 끝에 1176년 6월 윤인첨이 통양문을, 후군총관 두경승이 대동문을 쳐서 서경을 함락했고, 조위총은 사로잡혀 목이 베였다.[2]

조위총이 죽은 뒤에도 서경이 함락될 때 달아난 사람들이 1177년 다시 일어나 1년 반 동안 버텼고, 1179년에도 서북면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조위총의 거병은 무신 정권에 대한 지방 세력의 반발에서 시작했으나, 이후 일반 백성이 이끄는 서북 지방의 저항으로 이어졌다.[2]

고려 중기의 반란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건 시기 중심인물·성격
묘청의 난 1135년 서경 천도 실패 뒤 서경에서 대위국 선포 (→ 묘청의 난)
김보당의 난 1173년 동북면에서 의종 복위를 꾀함
조위총의 난 1174~1176년 서경 유수가 무신 집권자 타도를 내세움
망이·망소이의 난 1176년 공주 명학소 주민의 봉기 (→ 망이·망소이의 난)
김사미·효심의 난 1193년 운문·초전 농민 봉기 (→ 김사미·효심의 난)
만적의 난 1198년 최충헌의 사노비 만적의 신분 해방 모의 (→ 만적의 난)
  1. ↑ 『고려사』 권100 열전13 조위총,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2. ↑ 2.0 2.1 조위총의 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