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
IT 위키
더 많은 작업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동안 영의정과 도체찰사로 전쟁 수행을 이끌며 훈련도감 설치와 공물을 쌀로 거두는 법을 건의했고, 전란의 경과를 『징비록』으로 남겼다.

- 장수 천거 - 왜란을 앞둔 1591년, 정읍 현감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형조 정랑 권율을 의주 목사로 천거했다.
- 진관 체제 복구 주장 - 큰 적이 오면 지방 군사를 한곳에 모아 중앙에서 내려온 장수가 지휘하는 제승방략 체제의 약점을 지적하고, 지역 단위로 방어하는 진관 체제로 돌아가자고 했다.
- 전시 총괄 - 1592년 4월 전쟁이 일어나자 병조 판서를 겸한 도체찰사로 군무를 맡았다. 영의정에 오른 직후 피란길에서 탄핵을 받아 물러났으나, 평안도 도체찰사로 다시 기용되어 1593년 명군과 함께 평양성 탈환에 힘썼다. 같은 해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했다.
- 훈련도감 - 1593년 10월 선조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온 뒤 정예병을 기를 군영을 세우자고 청해, 포수·사수·살수의 삼수병을 기르는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 설치 시기는 1593년 말로 보기도 하고 1594년으로 보기도 한다. 유성룡은 그 제조를 맡아 명의 『기효신서』를 풀이해 훈련에 썼다.
- 공물 작미(대공수미법) - 군량이 다급해지자 고을마다 현물로 바치던 공물을 쌀로 거두자고 주장했다. 1594년(선조 27) 가을부터 1결당 쌀 2말 정도를 거두는 방식으로 시행되었으나 1년도 못 되어 폐지되었다. 이 경험은 뒤의 선혜법과 대동법으로 이어졌다.[3] 공물을 쌀로 거두자는 주장은 이미 1569년 이이가 내놓은 바 있다.
- 강화 반대 - 명과 일본이 화의를 추진하자 화의는 잘못된 계책이라며 반대했고, 화포 제조와 성곽 수축을 건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