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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동안 영의정과 도체찰사로 전쟁 수행을 이끌며 훈련도감 설치와 공물을 쌀로 거두는 법을 건의했고, 전란의 경과를 『징비록』으로 남겼다.

유성룡을 제향한 안동 병산 서원

본관은 풍산, 호는 서애(西厓)이다. 경상도 안동 하회 사람으로, 젊어서 이황에게 배웠다. 1566년(명종 21)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사간원 등 청요직을 거쳤고, 1590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붕당이 갈릴 때 동인에 속했고, 동인이 남북으로 나뉜 뒤에는 온건한 남인의 중심이 되었다.[1][2]

임진왜란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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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수 천거 - 왜란을 앞둔 1591년, 정읍 현감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형조 정랑 권율을 의주 목사로 천거했다.
  • 진관 체제 복구 주장 - 큰 적이 오면 지방 군사를 한곳에 모아 중앙에서 내려온 장수가 지휘하는 제승방략 체제의 약점을 지적하고, 지역 단위로 방어하는 진관 체제로 돌아가자고 했다.

임진왜란 중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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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시 총괄 - 1592년 4월 전쟁이 일어나자 병조 판서를 겸한 도체찰사로 군무를 맡았다. 영의정에 오른 직후 피란길에서 탄핵을 받아 물러났으나, 평안도 도체찰사로 다시 기용되어 1593년 명군과 함께 평양성 탈환에 힘썼다. 같은 해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했다.
  • 훈련도감 - 1593년 10월 선조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온 뒤 정예병을 기를 군영을 세우자고 청해, 포수·사수·살수의 삼수병을 기르는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 설치 시기는 1593년 말로 보기도 하고 1594년으로 보기도 한다. 유성룡은 그 제조를 맡아 명의 『기효신서』를 풀이해 훈련에 썼다.
  • 공물 작미(대공수미법) - 군량이 다급해지자 고을마다 현물로 바치던 공물을 쌀로 거두자고 주장했다. 1594년(선조 27) 가을부터 1결당 쌀 2말 정도를 거두는 방식으로 시행되었으나 1년도 못 되어 폐지되었다. 이 경험은 뒤의 선혜법과 대동법으로 이어졌다.[3] 공물을 쌀로 거두자는 주장은 이미 1569년 이이가 내놓은 바 있다.
  • 강화 반대 - 명과 일본이 화의를 추진하자 화의는 잘못된 계책이라며 반대했고, 화포 제조와 성곽 수축을 건의했다.

1598년 명의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짜고 명을 치려 한다고 무고한 일이 일어났을 때, 진상을 밝히러 명에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작을 빼앗겼다. 1600년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하지 않고 고향에 머물며 전란의 기록을 정리했다. 그 결과가 『징비록』이다.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시호는 문충이다. 안동의 병산 서원에 제향되었다.[1]

  • 세상을 떠난 날을 우리역사넷은 1607년 5월 13일로 적는다.[2]

같은 시기 인물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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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인물
『징비록』 저술, 훈련도감 설치 건의, 공물 작미 주장 유성룡
기대승과 8년 동안 사단칠정 논쟁 이황
『소학』 보급과 현량과 실시 주장 조광조
기축봉사를 올려 명에 대한 의리와 북벌을 내세움 송시열
처음으로 백리척을 써서 「동국지도」 제작 정상기
1569년 대공수미법 건의, 『성학집요』 이이
  1. ↑ 1.0 1.1 유성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2.0 2.1 유성룡 1542~1607,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3. ↑ 대동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