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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장성(千里長城)은 고구려가 당의 침략에 대비해 631년(영류왕 14)부터 동북쪽 부여성에서 남쪽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천여 리에 걸쳐 쌓은 방어선으로, 16년 만인 647년 무렵 완성되었다.

618년 수가 무너지고 당이 들어선 뒤, 고구려와 당은 한동안 포로를 돌려보내며 화친했다. 그러나 631년 당이 광주사마 장손사를 보내 수나라 병사의 해골을 묻은 곳에 제사를 지내고, 고구려가 수를 물리친 뒤 세운 경관(京觀, 적군의 시체를 모아 쌓아 전공을 드러낸 무덤)을 헐어 버렸다.[1] 고구려는 당의 침략이 머지않았다고 보고, 같은 해 2월 많은 사람을 동원해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2]

  • 범위 - 『삼국사기』는 동북쪽 부여성(지금의 지린성 눙안 부근으로 봄)에서 동남쪽 바다에 이르는 천여 리라고 적었다. 백과사전은 서남쪽 끝을 발해만의 비사성(지금의 다롄 부근)으로 설명한다.[3]
  • 구조 - 성 밖에 새로 긴 성벽을 둘렀다기보다, 요동 지역의 기존 산성들을 서로 이어 방어선으로 묶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랴오허 동쪽 평원에 흙으로 쌓은 장벽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2]
  • 기간 - 16년이 걸려 647년(보장왕 6) 무렵 끝났다.

연개소문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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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는 642년 1월 영류왕이 서부 대인 연개소문에게 장성 쌓는 일을 감독하게 했다고 적고, 『삼국유사』는 연개소문이 왕에게 청해 장성을 쌓았다고 전한다.[3] 공사를 감독하던 연개소문은 그해 10월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과 대신 100여 명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운 뒤 대막리지가 되었다(→ 연개소문). 645년 당 태종이 쳐들어왔을 때 요동성 등 장성 위의 성들이 첫 방어선이 되었고, 안시성은 끝까지 버텨 당군을 물리쳤다.

고려의 천리장성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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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고구려 천리장성 고려 천리장성
쌓은 때 631~647년(영류왕~보장왕) 1033~1044년(덕종~정종)
대비한 적 당 거란·여진
범위 부여성~남쪽 바닷가(요동 일대) 압록강 어귀~동해안 도련포
  • 수의 침입을 막은 살수 대첩(612)은 장성을 쌓기 전의 일이다(→ 살수 대첩).
  • 연개소문의 정변(642)은 장성 공사 중에 일어났다.
  1. ↑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영류왕 14년(631), 당이 경관을 허물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2. ↑ 2.0 2.1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영류왕 14년(631) 2월, 천리장성 축조를 시작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3. ↑ 3.0 3.1 천리장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