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메뉴 여닫기
환경 설정 메뉴 여닫기
개인 메뉴 여닫기
로그인하지 않음
지금 편집한다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될 수 있습니다.

연개소문(淵蓋蘇文, ?~665 또는 666)은 642년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과 대신 100여 명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운 뒤 막리지로서 고구려의 실권을 쥐고 당과 맞선 고구려 말기의 집권자이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개소문 또는 개금으로 나오며, 성을 연(淵) 대신 천(泉)씨로 적었다. 동부(또는 서부) 대인이던 아버지가 죽자 지위를 이으려 했으나 귀족들이 성품이 사납다며 반대했고, 머리를 조아려 사죄한 끝에 겨우 자리를 이었다.[1]

  • 642년 정변 - 귀족들이 영류왕과 함께 그를 죽이려 한다는 계획이 새어 나가자, 성 남쪽에서 군대 사열을 핑계로 잔치를 열고 모인 대신 100여 명을 죽였다. 이어 궁궐로 들어가 영류왕을 죽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이 일을 영류왕 25년(642) 10월에 적었다.
  • 보장왕 옹립 - 영류왕의 조카 장(臧)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막리지가 되어 나랏일을 마음대로 했다.
  • 도교 장려 - 왕에게 청해 당에서 도사 숙달 등 8명과 『도덕경』을 들여왔다(→ 한국의 도교).
  • 천리장성 - 정변이 있던 642년 정월, 영류왕은 서부 대인 연개소문에게 당의 침략에 대비한 장성(천리장성) 쌓는 일을 감독하게 했다.[2]
  • 신라와의 대립 - 642년 대야성을 잃은 신라의 김춘추가 군사를 청하러 오자, 죽령 이북 땅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며 그를 가두었다(→ 대야성 전투).
  • 당과의 대결 - 신라 공격을 멈추라는 당 태종의 요구를 물리치고 당의 사신을 굴방에 가두었다. 645년 당 태종이 직접 쳐들어왔으나 안시성에서 막혔다. 당의 거듭된 침략에 맞서 끝까지 버텼다.
  • 폭넓은 외교 - 몽골 고원의 설연타와 손잡아 당의 뒤를 견제하려 했고,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에도 사신을 보낸 것으로 본다.

죽음과 그 뒤

편집 원본 편집

그가 죽은 해를 『삼국사기』 열전은 건봉 원년(666)이라 적었으나[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665년(보장왕 24)으로 정리한다.[4] 그가 죽자 맏아들 남생이 자리를 이었으나 동생 남건·남산과 다투다 당에 항복했고, 동생 연정토는 신라로 넘어갔다. 지도층이 갈라지면서 668년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 멸망했다.

고구려 말기의 인물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활동 인물
정변으로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움, 막리지 연개소문
살수에서 수의 별동대를 무찌름(612) 을지문덕 (→ 살수 대첩)
연개소문의 맏아들, 동생들과 다투다 당에 항복 남생
안승을 왕으로 세우고 고구려 부흥 운동을 벌임 검모잠 (→ 고구려 부흥 운동)
백제 장군으로 대야성을 함락함 윤충 (→ 대야성 전투)
  1. ↑ 『삼국사기』 권49 열전 개소문,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키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2. ↑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영류왕 25년 1월, 연개소문에게 장성 축조를 감독하게 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3. ↑ 『삼국사기』 권49 열전 개소문, 연개소문이 죽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4. ↑ 연개소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