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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 대첩(薩水大捷, 612)은 고구려 영양왕 23년 7월 을지문덕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평양으로 쳐들어왔다가 물러가던 수의 별동대 30만 5천 명을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크게 무찌른 싸움이다.

살수에서 수의 군대를 무찌르는 모습을 그린 기록화(전쟁기념관)

612년 수 양제는 113만이 넘는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쳤다. 본대가 요동성 등에서 막히자, 우중문·우문술이 이끄는 9군 30만 5천 명이 별동대로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곧장 내려왔다. 이들은 출발할 때 100일 치 식량과 무기를 한꺼번에 짊어져 행군이 힘들었고, 병사들이 몰래 식량을 버리는 바람에 도중에 굶주리게 되었다.[1]

  • 을지문덕의 거짓 항복 - 을지문덕은 거짓으로 항복해 수군 진영에 들어가 굶주린 형편을 살폈다. 돌아온 뒤에는 싸울 때마다 일부러 져서 적을 평양 가까이까지 끌어들였다.
  • 우중문에게 보낸 시 - "신묘한 계책은 천문을 꿰뚫고, 기묘한 셈은 지리를 다했네. 싸워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치기를 바라노라"라는 시를 보내 적장을 조롱했다.
  • 수군의 고립 - 대동강으로 들어온 내호아의 수군은 평양성을 먼저 치다가 크게 져서 식량을 대 줄 수 없었다. 평양성 30리 밖까지 온 별동대는 성을 칠 힘이 없었다.
  • 살수 싸움 - 을지문덕이 다시 거짓 항복하며 물러갈 명분을 주자 수군은 돌아섰다. 고구려군은 이들을 뒤쫓다가 살수를 반쯤 건넜을 때 후군을 들이쳐 장군 신세웅을 죽였다. 수군은 하루 낮 하룻밤 사이에 450리를 달아나 압록강에 이르렀다.

『삼국사기』는 처음 요하를 건넌 9군 30만 5천 명 가운데 요동성으로 살아 돌아간 사람이 2,700명뿐이었다고 적었다.[2] 양제는 패전 소식을 듣고 군대를 물렸고, 이 싸움으로 612년의 전쟁이 끝났다. 수는 이후에도 두 차례 더 쳐들어왔으나 실패했고, 거듭된 원정으로 나라가 기울어 618년 멸망했다.[1]

같은 기사에는 백제 무왕이 겉으로는 수를 돕는다며 국경에 군대를 세웠으나 실제로는 두 마음을 품었다는 내용도 실려 있다.[2]

큰 싸움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싸움 시기·지휘 상대
살수 대첩 612년, 을지문덕 수
안시성 싸움 645년, 안시성주 당 태종 (→ 고구려)
대야성 함락 642년, 백제 장군 윤충 신라 (→ 대야성 전투)
기벌포 싸움 676년, 신라 시득 당 설인귀 (→ 나당 전쟁)
귀주 대첩 1019년, 강감찬 거란 (→ 귀주 대첩)
  1. ↑ 1.0 1.1 살수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2.0 2.1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7월, 살수에서 승리하고 수의 군대가 철군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