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 백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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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백서 사건(黃嗣永帛書事件)은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천주교도 황사영이 박해의 실상과 대책을 흰 비단에 적어 베이징의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된 사건으로, 서양 군대를 불러 달라는 내용 때문에 천주교 탄압이 더 거세졌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조카사위로, 1791년 처고모부 이승훈에게 교리서를 얻어 천주교를 믿기 시작했고 정약종 등과 교리를 공부했으며, 1795년 주문모 신부를 만나 성사를 받았다.[1]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 제천 배론의 토굴에 숨었고, 그곳에서 길이 62cm, 너비 38cm의 비단에 1만 3천여 자를 깨알같이 적었다. 이 글을 1801년 10월에 떠나는 동지사 일행 편에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하려 했으나, 연락을 맡은 황심과 옥천희가 붙잡히면서 황사영도 음력 9월 29일 체포되고 백서가 드러났다.[2]
글의 분량과 체포 경위는 출처마다 조금씩 다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22행 13,384자로, 우리역사넷 해설은 한 줄 110자씩 121행 13,311자로 적는다. 체포도 백과사전은 옥천희가 1801년 6월 베이징에서 돌아오다 의주에서, 황심이 음력 9월 15일에 붙잡혔다고 하고, 우리역사넷 해설은 옥천희가 9월 20일, 황심이 9월 26일에 붙잡혔다고 적는다.
- 박해의 경과 - 1785년 이후 교회의 사정, 신유박해의 전개, 순교자들의 짧은 전기,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죽음을 적었다.
- 교회 재건책 - 청 황제에게 청해 조선이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게 하거나, 조선을 청의 감독 아래 두게 하거나, 서양의 큰 배 수백 척과 군사 5만~6만 명을 보내 조정을 굴복시켜 신앙의 자유를 얻게 해 달라고 했다.
『순조실록』은 1801년 10월 5일(음력) 포도대장이 황사영의 글을 올린 일을 기록하며, 이 가운데 서양 군대를 불러들이자는 대목 등 세 조항을 흉언으로 꼽았다.[3]
황사영은 대역 부도죄로 음력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었고, 가족도 귀양을 갔다. 조정은 천주교를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세력으로 보고 탄압을 더 강화했다. 백서가 청에 알려질 것을 걱정해, 서양 군대를 청한 대목만 남기고 크게 줄인 이른바 '가백서'(922자)를 만들어 청 예부에 보내 박해가 정당했다고 설명했다. 원본은 의금부에 보관되다가 1894년 뒤 뮈텔 주교의 손에 들어갔고, 1925년 로마 교황청에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