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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민주 구국 선언(三一民主救國宣言, 1976)은 1976년 3월 1일 서울 명동 성당의 3·1절 기념 미사에서 윤보선·김대중·함석헌 등 재야 정치인과 종교인, 대학 교수들이 긴급 조치 철폐와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며 발표한 선언으로, 유신 체제 아래 가장 큰 반정부 선언 사건이 되었다.

선언이 발표된 서울 명동 성당

1972년 유신 헌법으로 대통령은 긴급 조치권을 가졌고, 1975년 5월 발동된 긴급 조치 제9호는 유신 헌법을 부정하거나 개헌을 주장하는 일을 모두 금지했다. 1976년 1월 원주 원동 성당에서 천주교 사제들이 '원주 선언'을 발표한 데 이어, 3월 1일 저녁 명동 성당의 3·1절 기념 미사 끝 무렵 이우정 교수가 선언문을 낭독했다.[1]

선언은 세 가지를 내세웠다.

  • 민주주의 - 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긴급 조치를 철폐하고 갇힌 민주 인사와 학생을 풀어 주며, 언론·집회·출판의 자유, 의회 정치, 사법권의 독립을 되살려야 한다.
  • 경제 - 수출과 외채에 기댄 경제 입국의 구상과 자세를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해야 한다.
  • 통일 - 민족 통일은 겨레가 짊어진 지상의 과업이다.

서명자는 윤보선, 함석헌, 정일형, 김대중, 윤반웅,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문동환, 이우정 등 10명이었다. 문익환은 성서 번역 일 때문에, 천주교 사제들은 원주 선언을 이미 낸 터라 서명에서 빠졌지만 뒤에 함께 처벌받았다.

  • 다음 날부터 관련자들이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었다. 정부는 이 일을 '3·1절 명동 성당 민주 구국 선언 사건'이라 불렀고, 흔히 '명동 사건'이라 한다. 3월 10일 검찰은 긴급 조치 제9호 위반으로 20명을 입건했다고 발표했다.
  • 1977년 3월 22일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문익환·김대중·윤보선·함석헌은 징역 5년, 정일형·이우정·이문영·문동환·함세웅 등은 징역 3년을 받았다. 관련자 대부분은 1977년 말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 백과사전은 김대중 등 11명이 구속되었고 1심에서 최고 징역 8년이 선고되었다고 적어, 우리역사넷의 서술(입건 20명, 확정 최고 5년)과 기준이 다르다.[2]

긴급 조치로 모든 비판이 막힌 상황에서 야당 지도자와 천주교·개신교 인사가 함께 유신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후 재야 세력과 종교계가 힘을 합친 민주화 운동이 이어졌고, 1979년 YH 무역 사건과 부마 민주 항쟁을 거쳐 유신 체제가 무너졌다.

유신 체제 반대 운동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건 연도
개헌 청원 100만 인 서명 운동 1973
민청학련 사건 1974
3·1 민주 구국 선언(명동 성당) 1976
YH 무역 사건, 김영삼 의원직 제명 1979
부마 민주 항쟁 1979
  1. ↑ 3·1 민주 구국 선언, 우리역사넷(사료로 본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2. ↑ 3·1민주선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