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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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조선 후기 영조·정조 때의 문인 화가이자 서예가·평론가로, 실경산수화에 서양식 원근법과 음영법을 받아들인 『송도기행첩』을 그렸고 김홍도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호는 표암이다. 진주 강씨로, 증조할아버지·할아버지·아버지가 대대로 조정의 요직을 지낸 소북 계열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정치적으로 어려워지자 오랫동안 경기도 안산에 머물며 성호 이익과 여주 이씨 집안의 젊은 학자들과 어울렸고, 실학과 서학의 영향을 받았다. 시·글씨·그림에서 모두 일가를 이루었다.[1]
- 절필 - 1763년 영조는 강세황이 '천한 기술' 때문에 얕보일까 염려해 그림을 삼가라고 권했다. 감격한 강세황은 붓을 태우고 다시 그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1]
- 늦은 벼슬 - 61세인 1773년 영릉 참봉으로 벼슬을 시작했다. 정조 즉위 뒤 1776년 기로과와 1778년 문신 정시에 잇따라 수석으로 급제해 20여 년 동안 관직에 있었다. 1774년부터 사포서에서 김홍도와 함께 일했다.[1]
- 어진 제작 - 1781년 정조의 첫 어진 제작을 맡아 한종유·신한평·김홍도 등 도화서 화원들을 이끌었다. 이를 계기로 다시 붓을 들었다.[1]
- 자화상과 연행 - 1782년 70세에 관모를 쓰고 평상복을 입은 독특한 자화상을 그렸다. 1783년 기로소에 들어갔고, 1785년 청 건륭제의 천수연에 부사로 다녀왔다.[1]
- 『송도기행첩』 - 1757년(45세) 무렵 벗인 개성 유수 오수채의 초청으로 개성과 그 둘레의 천마산·성거산 일대를 여행하고 그린 화첩으로, 그림 16점과 글 3편으로 이루어진다. 가까운 것은 크게, 먼 것은 작게 그리는 투시도법과 음영법으로 입체감과 거리감을 살렸다. 「영통동 입구」(영통동구)·「백석담」·「박연 폭포」 등이 걸작으로 꼽힌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다.[2]
- 남종화와 문인화 - 명·청의 회화 사조를 잘 알아 남종화풍을 조선 화단에 정착시키고, 사군자와 문인화풍의 화조화가 유행하는 데 이바지했다.[1]
- 평론 - 18세기 주요 화가들의 그림에 평을 적었다. 특히 김홍도와는 나이를 넘어선 예술의 벗으로, 그의 풍속화를 높이 평가하고 전기를 써 주었다. 형식화된 진경산수화를 비판하며 사실적인 표현을 강조했다(→ 진경산수화).[1]
- 문집 - 『표암유고』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