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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鄭敾, 1676~1759)은 조선 후기 숙종~영조 때의 화가로, 우리 산천을 직접 보고 그 특색을 담은 진경산수화를 개척했으며 「금강전도」·「인왕제색도」를 남겼다.

정선의 「인왕제색도」(1751)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원백, 호는 겸재·겸초·난곡이다. 한미한 양반 집안의 맏아들로 13세에 아버지를 잃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났고, 노론 명문가인 안동 김씨 김창집의 도움으로 벼슬길에 나섰다. 김창흡의 영향을 받았고, 시인 이병연과 평생 가깝게 지내며 시와 그림을 주고받았다.[1]

  • 벼슬 - 세자를 호위하는 위솔을 지냈고, 1729년 한성부 주부, 1734년 청하 현감을 거쳐 하양 현감, 1740년부터 1745년까지 양천 현령을 지냈다. 영조가 세제이던 때 위솔로 있었던 인연으로 말년까지 승진해, 1756년에는 화가로서는 드물게 종2품 가선대부 지중추부사에 올랐다.[1]
  • 유람과 사생 - 1711년 36세에 처음 금강산을 유람한 뒤 여러 차례 다시 찾았다. 금강산과 관동 지방의 명승, 남한강 가의 명소, 지방 수령으로 있던 고을의 경치, 그리고 자신이 살던 인왕산 일대 등 서울의 사철 풍경을 그렸다.[2][1]

화풍과 대표작

편집 원본 편집
  • 진경산수화 - 상상 속 중국 산수를 본뜨던 관념 산수화에서 벗어나 우리 산천을 직접 찾아가 보고 그렸다. 새로 들어온 남종화법을 받아들이면서도 자기만의 필묵법을 만들어 진경산수화의 정형을 세웠다. 짧은 가로선 몇 개와 굵은 사선 하나로 소나무를 그리는 식의 간결한 묘사가 특징이다.[1]
  • 「금강전도」(1734) - 59세 겨울에 내금강 전체를 하나의 둥근 구도에 담았다. 날카로운 바위산은 수직으로 내리긋는 선으로, 부드러운 흙산은 먹점으로 그려 대비를 이루었다. 국보이다.[2]
  • 「인왕제색도」(1751) - 76세 여름, 소나기가 그친 뒤의 인왕산을 먹을 여러 번 덧칠하는 적묵법으로 그렸다. 병이 깊던 벗 이병연이 낫기를 바라며 그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진경산수화의 완성작으로 꼽힌다.[2]
  • 그 밖의 작품 - 동해안 바위를 굵은 수직선으로 그린 「통천문암도」 등이 있다. 기록과 작품 수가 조선 화가 가운데 가장 많다.[1] 강원도 철원의 삼부연 폭포를 그린 그림도 잘 알려져 있다.
  • 영향 - 정선의 화법은 강희언·김윤겸·최북 등에게 이어져 겸재파를 이루며 19세기 초까지 화단에 큰 영향을 주었다.

「금강전도」의 크기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30.7×95cm로, 국가유산청은 세로 130.7cm, 가로 59cm로 적는다.[1][2]

조선 화가와 작품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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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대표작 때
안견 「몽유도원도」 조선 전기(세종)
정선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조선 후기(영조)
강세황 『송도기행첩』(「영통동구」 등), 서양 화법 수용 조선 후기(영조·정조)
김홍도 『단원 풍속도첩』, 「주상관매도」 조선 후기(정조)
신윤복 「월하정인」, 「단오풍정」 조선 후기
김정희 「세한도」 조선 후기(헌종)
  1. ↑ 1.0 1.1 1.2 1.3 1.4 1.5 정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
  2. ↑ 2.0 2.1 2.2 2.3 「금강전도」·「인왕제색도」, 진경으로 보는 우리 산(겸재 정선), 국가유산청,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