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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제도(其人制度)는 고려 태조 때 시작되어 지방 호족이나 향리의 자제를 인질로 수도에 머물게 하고 그 출신 지역의 일에 관해 자문하게 하여 지방 세력을 견제한 제도이다.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은 각지의 호족 세력에 기대어 나라를 이끌었기 때문에, 호족을 끌어안으면서도 통제할 방법이 필요했다. 태조는 호족과 혼인 관계를 맺고 왕씨 성을 내려 주는 한편, 지방 유력자의 자제를 개경에 올라와 머물게 하는 기인 제도와 중앙 관리에게 출신 지역을 맡기는 사심관 제도를 함께 시행했다. 기인 제도는 신라의 상수리 제도를 이은 것으로 본다.[1]

  • 고려 초기 - 호족의 자제가 인질로 개경에 머물며 그 고장의 일에 대해 자문했다. 호족 처지에서는 자제가 중앙과 줄이 닿아 지방에서의 권위를 높이는 길이기도 했다.
  • 고려 중기 - 성종~문종 대에 중앙 집권 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호족은 향리로 낮아졌다. 기인도 향리의 자제가 맡게 되었고, 일정 기간 중앙 관청에서 잡무를 맡거나 왕을 호위했다. 고향 출신 과거 응시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사심관을 추천하기도 했다. 정해진 기간을 마치면 관직을 받을 수 있어 중앙 관료가 되는 길로도 쓰였다.
  • 고려 후기 - 1106년(예종 1) 무렵부터 작은 현에까지 감무가 파견되면서 지방 견제라는 본래 기능이 약해졌다. 몽골과의 전쟁 뒤에는 궁궐 짓기 등 고된 노역에 동원되어 천한 역으로 바뀌었다. 1336년(충숙왕 복위 5) 폐지되었다가 1343년(충혜왕 4) 되살아났다.
  • 조선 - 조선에도 이어져 기인이 중앙 관청의 잡역을 졌으나, 1609년(광해군 1)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폐지되었다.
  • 시작 - 935년 신라 경순왕 김부가 고려에 항복하자 태조가 그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은 것이 시작이다.
  • 내용 - 중앙의 고관에게 자기 출신 지역을 맡겨 부호장 이하 향리를 임명하고 그 지역의 치안과 풍속을 책임지게 했다. 지역에 문제가 생기면 사심관이 연대 책임을 졌다.
  • 폐지 - 고려 후기 권문세족이 사심관 자리를 이용해 토지와 백성을 빼앗는 폐단을 낳아 1318년(충숙왕 5) 폐지되었다.[2]

다른 지방 통제 제도와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실 나라·제도
향리 자제를 인질로 수도에 머물게 함 고려 기인 제도
지방 세력가를 수도에 머물게 함 통일 신라 상수리 제도
중앙 고관에게 출신 지역을 맡김 고려 사심관 제도
지방관을 출신지에 보내지 않음 고려·조선 상피제
빈민에게 곡식을 빌려줌 고구려 (→ 진대법)
독자 연호를 씀 발해
  1. ↑ 기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2. ↑ 사심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