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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제사(同濟社, 1912)는 1912년 중국 상하이에서 신규식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로, 교민의 단결을 꾀하고 중국 혁명 세력과 손잡아 상하이 독립운동의 바탕을 마련했다.

동제사를 이끈 신규식(1920년 무렵)

신규식은 대한 제국 육군 장교 출신으로, 국권을 빼앗긴 뒤 1911년 상하이로 망명해 쑨원의 중국 동맹회에 한국인으로는 처음 가입하고 신해혁명에 참여했다. 상하이에 건너오는 한국인이 늘자 1912년 독립운동을 위한 교민 단체로 동제사를 만들었다.[1] 이사장은 신규식, 총재는 박은식이 맡았고, 김규식·신채호·홍명희·조소앙·문일평·박찬익·조성환·신석우 등이 간부로 활동했다. 회원은 300여 명에 이르렀다.[2]

  • 신아 동제사 - 중국 혁명 지도자들과 더 긴밀히 연대하려고 쑹자오런·천치메이·후한민 등 중국 국민당 인사들을 끌어들여 신아 동제사를 만들었다.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인의 지지를 얻으려는 것이었다.[2]
  • 박달 학원(1913) - 1913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세운 교육 기관으로, 박은식·신채호 등이 가르쳤다. 세 차례에 걸쳐 100여 명을 길러 중국 대학과 미국·유럽 유학을 주선했다. 한국 청년 100여 명을 중국 각지의 군사 학교에 입학시키기도 했다.[1]
  • 조선 사회당(1917) - 1917년 스톡홀름에서 국제 사회주의자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한국 독립을 호소하려고 잠시 '조선 사회당'이라는 이름을 썼으나, 대회가 무산되면서 흐지부지되었다.[1]
  • 신한 청년당과 임시정부 - 1918년 동제사의 젊은 회원이던 여운형·선우혁·서병호·조동호 등이 신한 청년당(신한 청년단)을 만들었고, 두 단체는 긴밀히 협력했다.[2] 신한 청년당은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로 보내고 단원들을 일본·국내로 보내 2.8 독립 선언과 3.1 운동의 분위기를 만들었으며, 1919년 4월 상하이에 차린 독립 임시 사무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모체가 되었다.[3]

1910년대 국외 독립운동 단체와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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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 지역 특징
동제사(1912) 상하이 신규식·박은식, 교민 단결, 박달 학원
경학사(1911) 서간도 삼원보 이회영·이상룡, 신흥 강습소(뒤의 신흥 무관 학교)
권업회(1911) 연해주 이상설·이종호, 『권업신문』
대한인 국민회(1910) 미주 해외 한인을 아우른 단체, 『신한민보』
의열단(1919) 만주 지린 김원봉, 조선 혁명 선언을 행동 지침으로 삼음
  1. ↑ 1.0 1.1 1.2 신규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2.0 2.1 2.2 동제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3. ↑ 신한청년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